[데스크창] 목민심서의 교훈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지방관의 필독서로 꼽힌다. 지방외직(外職)을 말하는 목민관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도지사나 시장 군수 등을 가리킨다.

 

이 목민심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외국행 비행기를 탈때 기자들의 사진촬영에 대비해 꼭 비치토록 했다는 일화가 있다. 비록 읽지는 않고 홍보효과를 노리긴 했지만 그만큼 이 책을 중요하게 여긴 셈이다.

 

2백년전에 지은 이 목민심서를 오늘에 비추어 보면 어떨까. 우선 그 배경부터 살펴보자.

 

학자들은 5백년을 이어온 조선왕조가 일제에 나라를 뺏긴 원인을 세도정치와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보고 있다. 더 엄격히 말하면 정조가 타계한 1800년을 전후해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고 보는 설이 우세하다.

 

정조는 효자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국정을 잘 이끌지는 못했다. 다음 순조에 이르러서는 모든 권력이 안동 김씨의 세도아래 들어갔다. 과거합격은 뇌물에 의해 좌우되고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 국정의 두 기둥인 인사와 예산이 모두 썩어 문드러진 것이다.

 

조선시대 청백리와 탐관오리를 연구한 박성수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따르면 당시 과거시험에서 소과(小科)급제에는 3만냥, 대과(大科)급제에는 10만냥을 뇌물로 바쳐야 했다는 것이다. 돈으로 합격한 뒤에 수령이 되어 임지에 부임하려면 또 돈이 필요했다. 특히 초사(初仕)라 하여 처음 수령이 되어 임지로 떠나는 자는 1만냥이었고 관찰사의 경우는 1백만냥이나 내야했다.

 

이렇게 매관매직이 공공연히 행해졌으니 수령된 자는 본전을 뽑기 위해 백성들의 호주머니를 갈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도 요즈음과 흡사했다. 차마 수령 자신이 직접 돈을 챙길 수 없으니 합부인(閤夫人)을 시켜 뇌물을 받았다. 합부인은 정실부인이 아닌 문간부인, 즉 첩을 일렀다. 2년전 정읍에서 국모 시장의 부인이 8천만원을 받은 것이나 요즘 임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방법과 닮은 꼴이다.

 

이러한 매관매직은 조선조말까지 계속되었다. 1896년 12월 10일자 독립신문 한글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조선정부에서 돈이 어려워 벼슬을 파는데 군사는 이십이원을, 순검은 사십원을, 원은 팔백원부터 천원까지 받고 파는 것을 황태자 전하께서 벼슬파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막으셨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1821년 씌어진 목민심서는 목민관으로서 새겨야할 일들을 부임에서 해관(解官)까지12편 72조로 조목조목 적고 있다. 그 중 백미는 율기(律己)편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는 수령이 지켜야 할 6가지 계율이 적혀있다. 그 첫째가 몸가짐을 단정하라, 둘째가 마음을 깨끗이 하라, 셋째가 가정을 바로 다스려라, 넷째가 청탁을 물리쳐라, 다섯째가 사치하지 말고 절약하라, 여섯째가 즐겨 베풀어라 이다. 특히 청심조(淸心條)에서 다산은 목민관이 뇌물받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가 알겠는가라고 생각하겠지만 밤중의 일도 아침이 되면 반드시 알려지고야 만다.(貨賂之行 誰不秘密, 中夜所行 朝已昌矣)'다산은 또 한나라때 양진의 말을 들어 '뇌물를 주고 받는 것이 두사람의 비밀이 될 것 같지만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고 했다.

 

요즘 공직사회에서는 임실군청 노계장 자살사건으로 불거진 인사비리가 화제가 되고 있다. 군수의 사법처리도 거론된다. 돈이 많이 드는 선거제도를 들어 동정론을 펴는 사람에서 부터 부도덕성에 치를 떠는 사람까지 반응도 다양하다. 비교적 깨끗하다는 군수가 그런 정도니 다른 지역은 오죽 하겠는가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군수가 간과한게 있다. 다산의 말을 빌리자면 큰 욕심장이일수록 반드시 청렴(智者利廉)한 법을 알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