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주변 실세들의 비리사건으로 촉발된 대선자금 수사가 정치권에 일대 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당초 검찰은 SK그룹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짓는가 싶더니, 차제에 모든 불법 정치자금을 밝혀 구시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5대 재벌기업은 물론 어떤 기업이라도 단서가 있다면 수사를 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천명하고 있다. 검찰의 칼끝이 어디까지 파고들어 갈지 예측할 수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번 수사가 정치권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정치개혁의 서막을 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시대에 털고 가야할 전근대적인 정치개혁 과제는 양손으로 꼽아도 모자란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것이 정치를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몰아넣는 고비용 저효율의 비생산적 정치제도와 관행을 개선하는 일이다. 고비용 정치구조의 대표적 사례는 지구당제도.
민주당이 올 초 내놓은 당개혁안이나 한나라당 최병렬대표가 지난 3일 전격 발표한 정치개혁 5대방안 첫머리에 '지구당제 폐지'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 정치개혁 햄심과제는 이미 정해진 바나 다름없다. 열린 우리당과 자민련도 전근대적 정치구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구당 폐지가 필연적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민주·한나라당과 함께 원칙적 합의를 했다.
그러나 일부 지구당의원장들이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은근히 반대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지구당이 폐지되면 음성 사조직이 판을 칠 우려가 있다''진성당원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가 활성화 되겠는가''당내 분란과 경선불복·조직 싸움 등의 부작용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공직 후보에 출마할 수도 없는 지구당위원장이 무슨 수로 조직을 관리하겠느냐'는 이류를 들어 반발을 하고 있다.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떻게 작은 실리 때문에 큰 명분을 버리려 하는가.
지구당이 폐지되면 당장 한달에 1천만원 이상이 들어가는 막대한 운영비가 절약돼 검은 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정치 신인들이 공천이나 선거운동에서 기존 조직에 기대지 않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길이 트이는데, 어찌 말로는 정치개혁을 외치면서 기득권 유지에만 연연하려 드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4당이 내년 17대 총선 전에 지구당을 완전 폐지키로 합의해 놓은 상황에서도 열린 우리당은 지구당 창당대회를 계속하고 있으니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