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요즘 한나라당 행태를 놓고 이 말을 떠올리면 일응 수긍이 간다. 민주당 비위 맞춰가며 공들여 노무현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을 통과시켜 놓으니까 대통령이 '거부권 운운'하고 나섰다. 법무부장관도 '권한쟁의 심판 청구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거야 한나라당 입장에서보면 무장해제 하란 요구나 다름없다. 그러니 다음에 쓸수있는 카드는 무엇이겠는가. 전가의 보도처럼 빼어들수있는 것이 폭로전술 아닐 것인가.
예고(?)했더대로 한나라당이 노대통령 측근들의 비리의혹에 대한 전면 폭로전에 나선 느낌이다. 이성헌 의원이 포문을 열었다. 그는 엊그제 국회 예결위에서 구속된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이 S그룹과 모 종교단체 관련 기업등에서 모두 9백억원을 받았다는 제보가 있다고 폭로했다. 대검이 최씨의 부인 추모씨로부터 이같은 진술을 확보한것으로 알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예삿일이 아니다. '돼지저금통 모금'의 순수성에 반했던 나이브한 노대통령 지지자들에겐 엄청난 충격이다. 같은날 '열린 우리당'이 발표한 대선자금이 1백28억원선인데 비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너무 놀랄 일은 아닐듯 싶다. 당장 검찰이 특검을 밀어 붙이려는 근거없는 의혹제기라고 쐐기를 박고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당측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이 대선자금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면책특권을 악용한 무차별 폭로전에 나섰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그리 간단해 보이지만은 않다. 이성헌의원은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더 많은 증거들을 제시할 것이고 또다른 제2·제3의 폭로도 준비하고 있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단언 하건대 이 폭로전이 쉽게 진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여부에 따라서는 확대 재생산 가능성이 더 크다. 국민들은 지난해 민주당 이낙연대변인이 지적한대로 '추리소설의 백일장'을 또다시 지루하게 보고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역지사지라도 요즘 한나라당의 행태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불법 대선자금의 꼬리를 먼저 잡힌것은 그 쪽 아닌가. 이회창씨와 최병렬대표가 국민에게 사죄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검찰수사에는 비협조적이면서 'X묻은 개가 겨묻은 개'나무라는 격으로 큰소리만 친대서야 국민들이 받아 들이겠는가. 다 그만두고 '아니면 말고 식'의 저질 정치코미디만이라도 이제 그만 둘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