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시조집 발간한 최승범 전북대 명예교수

 

'연휴의 창 앞을 / 산자락이 다가서고 / 나비 날 듯 벌이 날 듯 / 눈이 오는 아침을 / 춘설차 / 찻종 앞 턱을 고이면 / 내 그리운 / 얼굴들'(최승범 '춘설찻종 밀쳐 놓고' 中)'

 

의재 허백련 선생이 이른 봄 깊은 산 계곡에 엷게 쌓인 눈빛의 녹색 빛깔에 도취돼 차 이름을 '춘설(春雪)' 이라 지었다는 춘설차는 은은한 빛깔과 마음을 사로 잡는 향기가 있다.

 

고하(古河) 최승범시인(73·전북대 명예교수)의 시조가 그렇다. 시인은 "늙으니 시심이 자꾸 메말라 간다”고 말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 한 복판, 고고하게 자리잡은 '고하문예관(古河文藝館)'에서 이루어지는 시인의 문필활동은 자연의 독백처럼 담담하면서도 쉬임 없다.

 

최승범시인이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에 선정됐다. 지나간 천년의 시대를 돌아보고 새로운 천년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은 출판사 태학사의 눈에 띄는 기획. 최근 발간된 시조집 '춘설찻종 밀쳐놓고'가 그 결실이다.

 

시조집에는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반세기 동안 발표해온 시인의 대표 작품이 모두 담겨 있다.

 

생활에서든 작품에서든 언제나 선비적 기품을 잃지않은 시인은 자연을 소재로 인간의 많은 감정들을 시조시에 담아냈다.

 

'운미(韻味)'와 흥을 동시에 품은 시의 세계. 글맛은 풍부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깊으면서도 다 말해버리지 않는 말 밖의 풍취는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 든다. 많은 여운과 함께 동시에 물씬 풍기는 함축미는 그의 시조가 지닌 미덕이다.

 

시인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통해 진실성을 확보하고 그에 대한 참된 묘사를 시에 담아내려고 힘써 독창적인 교술시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는다. 평범한 소재를 통해 나름의 전통과 주체성을 살려내고, 서정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시적 세계는 독창적인 경지다.

 

그의 이번 시조집 간행의 의미는 각별하다. 육당 최남선·가람 이병기 등 문단의 큰 궤적을 남긴 작가들로 이어지는 선정의 영예로움도 그렇거니와 시인의 반세기 문학세계를 정리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장경렬·신범순·이경호·이문재·최한선·이지엽씨 등 권위있는 전문가들로 시집 간행 편집위원회가 구성된 것도 눈길을 끈다. 최한선 교수(도립담양대)는 최승범시인을 '내적인 함의가 많은 시를 쓰는 시인, 언외(言外)의 말을 많이 하는 시인, 독특한 경계를 열어 교술시의 무한한 생명성을 획득한 시인'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남원 출신으로 지난 96년 전북대를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가 됐다. 2002년부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으며 멈춰있는 듯 쉬임없는 작품활동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문학동인지 '전북문학'은 창간된지 36년이 지난 지금도 시인의 손에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