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아니, 내가 꽃을 보고 있음은/황홀한 임의 빛 쬐고 있음./그 빛 흠뻑 쬘라치면,/사바가 온통 울긋불긋.'('꽃을 보며' 부분)
'사바(娑婆)는 아름다운 꽃을 피움으로써 참고 견디어야 하는 세계'라고 말했던 눌당(訥堂) 하희주 시인이 사바를 떠나며 '사바의 꽃'(푸른사상 펴냄)을 헌사했다. 등단 50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이다. 세상과 삶의 근원, 자연의 섭리를 잔잔하면서도 매운 시어로 그렸다. 많은 작품을 선보인 시인이었지만, 책을 내는 일에 무감했던 그는 등단 40년만인 1994년 처녀시집 '자화상'을 냈고, 두 번째 시집 발간을 하루 앞둔 지난 달 30일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투병 중에도 교정을 보거나 책표지를 직접 고르는 등 이번 시집 발간에 많은 정성을 쏟은 것으로 알려졌다.
줄곧 그의 곁에서 함께 했던 문학평론가 이운룡씨는 "고인은 시를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고 섭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과 겸허한 마음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채수영씨도 그를 '시의 신전을 찾는 나그네'라고 표현했다. '시는 강물처럼 흐르고 바다처럼 너울거리며 치솟아 부서져 잉태한 무지개를 찬연하게 비추는 물보라 같은 율어(律語)로 피워내는 꽃 중의 꽃'이라던 시인은 문학과 함께 해 온 평생을 이 한 권에 쏟아낸 모양이다. 시집에는 시에 대한 다양한 의미와 형태가 엿보인다.
특히 '언어유희'라는 테마로 엮인 시들이 안기는 감성은 특별하다. '김상술이 이상술이/수리수리 마하수리'('상수리' 부분)나 '이도돌이 김도돌이 히읗(ㅎ) 빠진 도토리들'('도토리' 부분)처럼 그의 시를 읽다보면 살포시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하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시의 끝자락에서 어금니를 악 물어야 할 만큼 아픈 시도 있다. 지금껏 시인이 인생이나 사물의 접촉에서 깨닫고 느낀 버거운 충격들을 어떻게 꾹꾹 눌러 다독이고 참아왔는지 궁금할 뿐이다.
'혼례식 주례설 사람, 축사할 때 조심하소./'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 운운하면 큰일날레./골드가 실버되도록 해로(偕老)하라 하시소.'('정문일침' 전문)
시인의 시는 자유를 얻은 듯 언어에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다. 마음에 있는 말을 꺼내기만 하면 시가 된다. 고령의 시인임을 감안하더라도 소박한 언어를 통해 정겹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선생의 시정신은 매우 맑고 순수하다. '가새짬시조'라는 새 구성미학의 시조 형식을 창안한 그의 흔적을 따라 시집을 넘기다 보면, 전북대 최승범 명예교수와 문학평론가 박이도·박진환씨의 시평도 함께 읽혀진다.
전주 출신으로 전주고와 중앙고 교사를 지낸 시인은 '고문교실' '바른 말 바른 글' 등 시집보다 더 많은 교육관련 서적들을 남겼다. 1955년 '현대문학'에서 시 추천을 받아 등단했으며, 1993년 전북문학사에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모악문학상을 제정해 전북문학의 건강한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모악문학상은 적지 않은 상금과 상의 운영비를 시인이 모두 지원해 특별한 의미를 전했던 상이다.
'노란 은행잎이/소리 없이 떨어진다,/가볍게 가볍게.//봄철의 가뭄과 여름철의 우박은/다 잊어버리고/훌훌 떠나는 마지막 길이매./소리 없을 밖에'('은행잎'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