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야생초를 만나는 기쁨

 

꽃피는 계절 사월이 왔다. 태양은 바람의 손을 빌어 겨우내 잠자던 삼라만상에 새 생명을 아낌없이 불어 넣어 준다. 단단히 다져진 길섶에서도, 짓이겨진 검불아래에서도, 바람에 서걱거리던 갈대숲에서도 이름 모를 잡초들의 가녀린 새싹들이 서로 경쟁을 하듯이 솟아오르고 있다. 지난 가을에 잎, 꽃, 열매 가리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 주었던 나목들의 떨겨마다 새싹과 새 꽃망울들이 부풀어 오른다.

 

세상에서 제일 출세자는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호강은 더 더군다나 아니다. 그것은 오직 '건강히 오래 삶'임을 새롭게 깨달았다. 누구나 건강한 삶을 요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장수인의 공통적인 건강관리는 '소일거리'를 일생동안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거리'가 없는 삶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여 삶을 따분하고 의욕을 상실시켜 결국 건강까지 앗아간다. 내가 학창시절 관심 있게 읽었던 장만의 시조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후론 배도 말도 말고/'밭갈기'만 하리라”

 

내 나이 벌써 육학년 졸업반 가을 학기를 맞고 있다. 퇴직 후 소일거리를 찾으려고 오랫동안 헤매었다. 이 시절 나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스스로 소일거리를 만드는 것일 뿐이었다. 다행히 노처녀 총각이 오랜 후에 해후하듯 물 좋고 공기 좋은 동상면 산골에 나의 '일터'를 만들었다.

 

아침 일찍 샐러리맨들은 직장으로 달려가지만 나는 반대로 산골짜기로 가서 돌을 치우는 일을 했다. 그 돌들이 나에게는 좋은 자원이 되어 그를 이용하여 옹벽을 쌓고 탑을 쌓았다. 돌무덤을 파헤치면서 금낭화, 맹문동, 참빗살나무 등 여러 종류의 야생초를 만났다. 뿌리 채 드러난 이들은 다른 빈 공터에 가식을 했다. 그러나 담홍색 줄기의 여리디 여린 금낭화만은 분에 옮겨 집 옥상에 올려졌다. 분에서 뿌리를 내려 잘 자랄 것으로 알았으나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잎과 줄기가 노랗게 병들어 시나브로 말라 죽어갔다.

 

식물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쉽게 고사한다며 분에 옮겨 심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겨울에 추위가 몰려오자 다른 화분들과 함께 비닐하우스 속으로 옮겨놓았다. 날씨가 풀려 물을 주고 비닐을 걷어 내려하니 빈 화분 속에서 순간적으로 담홍색 줄기가 나의 시선과 마주쳤다. 여린 생명의 끈질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금낭화는 뿌리만은 화분 속에서 숨을 쉬며 새 봄이 오기만을 무한히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 후 사월 초에 봄볕이 나를 불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먼저 금낭화에 눈길을 돌렸다. 낚시꾼들이 월척 시에 낚시대가 휘어지듯이 꽃대에는 하트 모양의 담홍색 금남이 함초롬히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다. 매달린 꽃들은 위로 갈수록 점점 작아져서 마치 하나의 실로폰 악기를 연상케 했다. 예쁜 멜로디가 당장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꽃마다 맛과 멋을 내 보이지만 금낭화처럼 아름답고, 자태가 고고하며, 수줍은 듯하면서 뽐내는 것을 보면 스스로 여기기엔 우리 꽃을 대표하는 꽃중의 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금낭화를 대할 때마다 하트 모양의 금낭에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씨가, 며늘아기 허리춤에 메달린 금낭 속에는 행복이 가득 담겨 있을 것만 같다.

 

오늘도 나는 동상의 푸른 공기를 맡으며 또 다른 금낭화를 찾아 돌무덤 주변을 서성인다.

 

/이종덕(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