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이 밝아지자 '쌍시옷'부터 튀어나왔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기 위한 그를 향한 환영인사였다. 나름대로 귀하게 자랐다는 그가 다큐멘터리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2004 전주국제영화제 메인 프로그램인 '인디비전' 섹션의 유일한 한국 작품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 때 그는 스물셋이었고, 스물여덟인 지금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됐다. '무대포 정신'으로 충전된 이은아 감독(28)을 만났다.
큰 마음 먹고 소주를 사들고 다리 밑으로 갔다. 이미 여러 사람이 돌려마신 후라 침과 술로 범벅이 된 스탠레스 컵에 소주를 받아들었다. '그래도 이 쪽이 입을 적게 댄 것 같아.' 스스로 위안하며 술잔을 들이키고 다른 사람이 먹던 숟가락으로 국을 떠먹었다. 일종의 시험이었다.
하루에 소주 빈병 40개가 나오는 곳. '우리는 거지'라고 스스름없이 말하는 사람들. 취해서 겁도 몰랐다는 용감무쌍한 그와 부산대교 밑 노숙자들의 만남은 2000년 1월부터 시작됐다. 그곳에서 불리워진 별명은 '꼬맹이' '이쁜이' '딸래미'.
"기대 이상으로 관심 보여주셔서 감사드려요. 완성되고 나니 제목부터 지극히 주관적인 작품이 됐지만, 처음에는 IMF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끌어내고 싶었어요.”
6mm를 통해 본 다리 밑 세상은 MBC 아카데미 수료 작품이다. 베트남어를 전공하고 무역회사에 취직도 했었지만, 영화를 만들고 싶어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첫 도전치고는 거친 상대였고, 첫 작품인 점을 감안한다해도 감독의 치열한 고민과 진정성은 그 이상이었다.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에게는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이 적이에요. 다큐는 고발성이 강하다고 생각해 걱정을 많이 하지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여성감독이라 덕을 본 것 같아요. 나이도 어린 여자애가 주는 술 다 받아마시면서 친해지려고 노력하니까 기특했나봐요.”
3개월만에 그들과 '관계맺기'에 성공했다. 누군가는 3백원짜리 사발면을 내밀며 사랑을 고백해 왔고, 어느날은 누군가가 '꼬지(구걸)'한 돈을 택시타고 다니라며 주기도 했다.
극영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는 다큐멘터리를 선택했다.
"다큐 작업에서는 '관계맺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대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친해지는 과정이 화면상으로 나타나잖아요.”
그러나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은 심리적 갈등이 많다. 그는 "작품을 만드는 동안 주체적이지 못한 그들의 삶이 실망스러워 한동안 공백기간을 가졌었다”고 고백했다. 힘들고 지칠 때면 자꾸 다리 밑이 생각났다. 떠남과 만남이 익숙한 그들은 어제 만났던 것 처럼 그를 맞아줬다.
"화면의 구도로 내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할 때였어요.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있는데, 아저씨들은 카메라만 찍지말고 자기 이야기를 들으라고 했어요. 어떻게 해야될지 혼란스러웠지요.”
손을 카메라 렌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과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카메라가 손에 익어 보지 않고서도 정확한 구도를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 다큐멘터리는 노숙자에 관한 것이지만, 사실은 그의 성장 다큐멘터리다. 그는 "그들은 삶 전체를 손에서 놓았지만, 지금 나도 삶의 어느 한 부분을 포기한 노숙자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지금 다리 밑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됐지만, 다리 밑 그들은 대부분 죽거나 실종됐다. "머리로 알고 쓰는 작품은 거짓이지만, 피부로 느끼고 눈으로 확인하고 만드는 작품은 남이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해주던 다리 밑 아빠. "이쁜이가 영화제 나간다고? 좋지”하며 그들은 첫 작품의 주인공이 돼줬다.
다음 작업은 부산 완월동 사창가를 생각하고 있다. 벌써부터 들락거리며 그들과 '관계맺기'에 한창이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그의 나이 서른한살 즈음, 두번째 작품이 세상에 나온다. 그는 또 얼마나 자라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