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은 판소리에서 얻은 독특한 형식을 활용해 개성적인 글쓰기를 개척했다.”
평북 정주 출신인 백석 시인(본명 백기행·1912∼1995)의 시세계가 지닌 독특한 표현형태와 양식이 우리의 전통적인 문학양식인 판소리와 연관돼 있음을 규명한 논문이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상명대 한국어문학과 고형진 교수(46·한국근대문학회 회장)가 현대문학이론학회(회장 김춘섭)의 학술논문집 ‘현대문학이론연구 제21집’에 발표한 ‘백석시와 판소리의 미학’. 백석의 작품과 판소리의 연관성이 학계 내부에서 언급된 적은 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연구해 발표한 것은 고교수의 논문이 처음이다.
고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해 “백석은 판소리에서 수액을 얻은 독특한 시 양식을 긴 사설의 문체로만 사용하지 않고, 비교적 간명한 서술과 묘사의 문체로도 사용해 개성적인 시의 스타일을 개척했다”고 밝혔다.
백석은 감각적 이미지를 구사하는 시와 전통 민요의 가락을 계승하는 서정시, 맑고 투명한 어조의 낭만적인 서정시 등 다양한 형태와 기법의 시를 쓴 시인.
고 교수는 백석 시의 특징을 ‘평북지방의 토속어와 사투리를 시의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반복과 부연, 열거로 상징되는 시의 문체로 토속적인 삶의 세계를 서술해 낸 것’이라고 들고 그가 즐겨 사용한 반복적 열거 기법은 판소리 사설과 유사하고, 운문·산문의 혼합적 기법은 창과 아니리가 교체하는 특징을 닮았다고 밝혔다. 또 특정 장면을 강화·확장시킨 서사적 시 양식도 판소리의 서사구조와 비슷하다고 제시했다.
‘사설’의 형태와 유사한 백석의 반복적 열거는 우리 고전시가 가운데 엮음아라리·사설시조·사설난봉가·휘모리잡가·서사무가·판소리 등에서도 보여지는 서술기법이다. 시적 상황에 따라 어휘와 문장의 반복적 나열을 통해 다양한 시의 의미를 창출한 백석과 사설의 적절한 변형을 통해 특유의 미적 원리를 전달하는 판소리의 미학은 서로 접맥돼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는 또 ‘창’과 ‘아니리’의 교체로 이뤄진 판소리의 가창구조를 주목, 백석의 글에서도 운문과 산문이 일정한 간격을 주기로 반복·진행돼 시의 의미와 정서를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다고 밝혔다. 각 장면이 장황한 서술과 묘사로 강화·확장돼 있는 독특한 서사적 양식도 판소리의 서사구조와 깊이 맞닿아 있다고 고교수는 강조했다.
백석은 김소월·한용운·정지용의 시세계를 동경했지만 그들이 지향한 형식을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형식을 창출해냈다. 고교수의 논문은 이러한 백석 시의 형태와 양식의 뿌리를 통시적 관점으로 주목한 연구의 결실이다.
시인과 전통음악의 관계를 분석한 논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소월과 만해의 경우도 민요와 내방가사의 미학적 원리에 시의 뿌리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고 교수는 ‘백석문학론집’(새미·1996)을 출간하는 등 줄곧 백석의 작품과 삶을 연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