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규칼럼]우물의 변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 있어서 물은 필수불가결이기에 태고시대에는 아예 우물가에 움막을 치고 살아왔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자연수가 고이는 곳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광야 또는 산전을 개발하여 농경과 목축을 영위하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우물은 촌락단위로 1~2개씩 있어서 동네 사람이 함께 먹고사는 중요한 요새이다. 우물이 헐지 않고 객수가 침범하지 않도록 주변에는 구기자나무나 뿌리가 물에 상하지 않는 나무를 심어 보호하며, 덮개를 덮어 날짐승들의 방뇨와 불량물을 방지했었다. 그리고 추석절과 같은 명절이면 모두모여 우물을 품어 깨끗이 청소하고 밤에 촛불을 밝혀 동네의 무사안일을 축원한다.

 

우물은 생명수이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조선조의 도읍지로 한양을 선택한 것도 4방에서 솟아나는 많은 물을 고려한 것이다. 서울의 북악산을 중심으로 오른쪽 인왕산 줄기에서 흐르는 물은 백호수ㆍ왼쪽 삼청동 뒷산에서 흐르는 물은 청룡수ㆍ남산의 물은 주작수라 했다. 같은 물이지만 산위에서 흐르는 물과 산밑에서 나는 물의 맛이 다르고 바위틈새에서 솟는 물과 모래에서 나는 물의 맛이 다르며, 흙에서 나는 물은 맑으나 맛은 텁텁하고, 흐르지 않고 고인 물보다는 흐르는 물맛이 좋다. 조선조 때 선비 우남양은 암물과 숫물을 구분하여 마셨는데 물빛이 맑아 물밑이 훤히 보이면 숫물이며, 물빛은 희어도 물밑이 어두우면 암물로서 먹지 않았다. 음지쪽 우물보다 양지쪽 우물을 선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원전 69년 촌장들이 모여 왕을 추대하고 있는데 때마침 경주 알천 양산밑 우물(蘿井=나정)옆에 이상한 기류와 함께 흰 말 한 마리가 붉은 알 한 개를 놓고 하늘로 올라간 후에 알에서 태어난 이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다. 우물옆을 선택한 것도 신성한곳을 의미한 것이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다.

 

'성경'에도 우물에 대한 기록이 많다.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러 떠난 종 엘리에셀이 우물에서 리브가를 만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에서 우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여인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다. 1787년 옥과 현감이 많은 방문객에 시달렸는지 스님에게 문의하여 울안의 우물속 거북모양으로 된 돌을 깨 없애자 우물이 마르면서 손님들이 끊기고 가세도 차츰 기울러졌다고 한다.

 

명현들이 즐겨먹었던 우물을 보면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부소산에 있는 우물만 이용했기에 이 우물은 어정(御井)이라 했으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서북쪽에 있는 우물을 단정(檀井)이라 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우물은 먹는 것 말고도 신비성이 많다. 일시에 동네 아낙네들이 바가지로 퍼내는 물은 줄지 않지만 며칠 동안을 퍼내지 않아도 넘쳐흐르지는 않는다. 겨울에는 짐이 날 정도로 따뜻하지만 여름철에는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것이 명수(名水)이다. 새벽달이 지기전에 여인들이 우물에 가서 달을 바가지로 떠서 먹으면 달덩이와 같은 자녀를 낳는다는 주술법도 있어서 매월 보름날 새벽에는 목욕재계한 여인들이 우물가에 가득했다. 새벽에 길러온 물을 조왕에 한주발 갈아 올리고 가정의 태평을 빌었다. 우물은 소중한 것이어서 먹는것 외에 빨래를 빨거나 목욕을 하지도 않았다.

 

옹달샘에서 두레박으로 다시 수동식 펌프에서 자동식 펌프를 사용하던 것이 최근에는 상수도가 발전하면서 우물을 보기가 쉽지 않고, 있는것도 오염도가 심하다고 한즉 우물의 변천도 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