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문서의 향기] 사인은 우리 고유의 전통

1907년 정생원댁 노 대돌이 주인의 논 25마지기를 백화(白貨) 4천냥에 이참봉댁 노 판석에게 방매하는 문서(위). 1883년 4월 이소사가 오생원댁 판삼 앞으로 작성한 토지 매매문서. (desk@jjan.kr)

요즈음 기업이나 공공기관 문서에도 도장만이 아니라 싸인(서명)이 통용되고 있다. 문서의 결재 과정이나 본인임을 확인하는 절차는 반드시 도장을 찍어야 했던 관행에 변화가 온 것이다. 더욱이 전자결재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싸인까지도 인감도장처럼 등록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싸인은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선조들이 쓰던 관행이었다. 그러던것이 일제 강점기시기를 거치면서 도장이 유일한 증빙 수단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도장은 왕의 어보(御寶)나 관아의 관인(官印) 등 공문서에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관급문서나 개인간의 증빙문서에는 모두 싸인을 했다. 물론 ‘싸인’(sign)이라는 영어가 아니라 한자어로 ‘수결’(手決)이라고 하였는데 양반뿐만이 아니라 상민은 물론 여자나 노비들까지도 싸인을 하였고 남녀, 신분의 구별은 엄격하였다.

 

일반적으로 양반들은 토지나 가옥, 노비 등을 사고파는 것도 상행위에 속하기 때문에 이를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집안의 사내종에게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상행위의 당사자인 노(奴)는 매매문서 말미에 아무개 집 노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왼쪽 손을 펴 놓고 붓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그리고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의 위치를 표시하였는데 이것이 곧 노비의 싸인인 수촌(手寸)이다.

 

남자는 왼손 중지인 좌촌(左寸), 여자는 오른손 중지인 우촌(右寸)이라고 하였다. 지문이라는 근대과학이 없었을 무렵 손과 손 가락 마디의 크기가 자신의 서명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인 여성의 경우, 성 뒤에 양인의 여자 뒤에 붙는 소사(召史)라는 명칭을 기재하거나, 아무개의 처 아무개 소사라고 기재한 후 손바닥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를 수장(手掌)이라 하였는데 역시 오른손은 우장(右掌), 왼손은 좌장(左掌)이라 하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도장을 사용한 계층은 양반 여성으로 양자문서나 분재문서에는 이름을 쓰지 않고 성씨만 기재한 후 네모난 방형의 도장을 사용하였는데 자신의 고유한 이름은 사용하지 못하고 누구누구의 처 모씨라 새긴 것이었다.

 

하지만 문서작성시 반드시 수결을 한 것은 아니었다. 매매의 경우, 매도자가 상(喪) 중일 때는 “상중(喪中)이라서 착압(着押)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상불착(喪不着)을 문서에 게재 하였는데 아마도 우리 조상들은 효(孝)를 중요한 미덕으로 삼아서 감히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잡스러운 매매 계약을 하는 것은 효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생각한 것 같다.

 

예법과 명분을 중시한 조선시대에는 수결에도 신분·남녀의 구별이 엄격하게 지켜졌음을 알 수 있은 것이다.

 

/정성미(원광대 강사·전북대박물관 고문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