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갑'과 '을'이 평등한 사회

최근 맡게 된 작업 일정이 너무 빠듯하여 일부는 외주를 주기로 했다. 간부회의에서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프리젠테이션에 참가하는 모든 업체들에게 경비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산규모도 정식으로 밝혔다. 이러한 내용을 제안요청서에 담아 업체들에게 발송했다.

 

참가비 지급을 결정했기에 대상 업체 선정에 신중했고 접수된 제안서를 놓고도 프리젠테이션을 요청할 업체를 엄선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함부로 오라 가라 하지 않았고 제안서도 1부만 보내게 해서 필요한 수량은 우리가 복사했다.

 

이렇게 한 것은 최근 몇 년간 겪은 너무도 불합리한 기업풍토. ‘갑’과 ‘을’의 부당한 권력관계 때문이다.

 

올 초 익산의 어느 양조회사는 우리회사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를 각각 불렀다. 두 차례나 불려가서 한 일은 프로그램 설계에 대한 강의에 가까운 프리핑이었다. 완주 소양에 있는 **연수원은 직접 오라 하더니 제안서 원본 시디와 칼라인쇄 7부 뿐 아니라 메인 디자인과 서버 디자인 견본도 요구했다. 정해 준 날에 두 명의 직원이 가서 한나절동안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200만원 규모의 이 프로젝트에 4개 업체가 그랬던 것이 나중에 확인되었다.

 

전주 서신동에 있는 어느 건설회사는 곡절을 거쳐 계약서 초안이 확정되었고 날인만 남았었지만 다른 업체랑 계약을 했다. <전주라인> 에서 제공 된 모든 자료를 고스란히 딴 업체로 가져가서 흥정을 한 것이다.

 

사기업만 이랬던 것이 아니고 공공기관도 마찬가지였다. 전주지방**청은 전체적인 진행 일정도 안 밝히고 몇 번이고 불렀다. 여러 날에 걸쳐 각 지방의 **청들을 조사하여 사이트맵과 디자인견본을 제출했다.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 확인 했더니 계획자체가 취소되었다고 했다. 전주지방***회도 꼭 같은 경우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북발전*** 이였다. 100여 페이지나 되는 제안서를 칼라로 11부를 요구했고 그것도 두 번이나 제출하게 했다. 프리젠테이션 비용은 빼더라도 인쇄비와 인건비만 100만원이 넘는 액수였다. 최종발표일도 공개하지 않았었고 문의 할 때마다 심사 중이라는 대답이 두 달을 넘기더니 결국 재시행 한다는 것이었다.

 

‘갑’은 눈에 보이는 모든 회사들을 불러들여 ‘을’로 삼았고 이러저런 요구를 함부로 했다. 60간지를 이루는 10간 중 하나에 불과하고 표기상의 편의를 위해 정해졌으리라 여겨지는 ‘갑’과 ‘을’은 계약서류에 등장하면서 적나라한 권력관계로 돌변했다.

 

서부우회도로에 있는 모 창호회사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네 차례나 조정 합의된 견적서와 도메인등록과 서버세팅, 본 작업을 시켜 놓고도 돌연 법대로 하라며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버려서 충격이라는 게 아니다. 그 회사에서 준 자료의 이면지에는 대금을 받지 못한 ‘을’의 애원이 담겨 있어서였다. ‘갑’의 지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군림하던 그 창호회사가 다른 ‘갑’ 앞에서 보이는 초라함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공손한 ‘갑’과 당당한 ‘을’을 꿈꾼다.

 

/전희식(농부·전주라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