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용서(容恕)

자칭 ‘박중령’별명은 ‘반달곰’폭행에 잠안재우기는 기본이고 관절빼기에다 물고문 전기고문 칠성판고문까지 고문이라는 고문은 못하는 것이 없는 고문기술자 이근안(66·전 경기도경대공분실장). 그의 고문기술이 얼마나 교묘하고 악랄했으면 남영동(서울) 대공분실에 잡혀간 민주투사들이 ‘이근안’이라는 이름 석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 했겠는가.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58)과 이씨의 악연은 지난 1985년 대공분실 취조실에서 시작됐다.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민청연) 의장이었던 김 장관은 집시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끌려가 이씨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속옷만 입힌 채 무릎을 꿇린 것은 다반사고 담요에 둘둘말아 물고문을 하는 등 20여일 동안 11차례나 혹독한 고문에 시달린 것이다.

 

김 장관이 80년대 재야민주화운동의 표상이었으니 고문의 강도야 물어서 무엇하랴. 대공분실에서 풀려난 후 석달 반 동안 걸음을 제대로 못 걸었고, 대법원도 이같은 고문 사실을 인정해 ‘국가가 4천5백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1994년 10월)는 판결을 내렸을 정도니 이씨의 악독한 고문수법이야 보지 않았어도 미뤄 짐작이 간다.

 

한데 세상 참 개떡같은 구석도 있다. 국가권력이 허가한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민주투사를 조진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서부터 청룡봉사상까지 상이라는 상은 모조리 휩쓸며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치 않아 독재권력은 종말을 고하고 이씨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11년 동안이나 도피생활을 하던 이씨는 결국 자수를 하여 7년형을 선고받고 지금 여주교도소에서 죄값을 치르고 있다.

 

김 장관이 20년 전 자신을 모질게 고문했던 이씨를 면회하고 ‘용서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김 장관은 면회 전날 만감이 교차해서인지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99년 이씨가 자수했을 당시만 해도 김 장관은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모욕적인 상황이어서 기억하고 싶지 않다”“용서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다. 군사독재의 하수인으로서 국민을 모독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적절치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악연의 끈을 끊어버린 김장관의 용서는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용서하라. 남도 용서하고 나도 용서하라. 그래야 업장이 소멸될 것이다.”백번을 들어도 지당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