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시비(詩碑) 시비(是非)

이동희 시인

시비(詩碑)에 대하여 할 말[是非]이 있다. 금년 초에, 출향한 원로 시인의 시비(詩碑)를 세우겠으니 전북문협에서 후원하고 전주시에서는 부지를 제공해 달라는 안건이 전북문협의 정기총회에 상정 되었다. 평생을 시문학에 바친 원로 시인의 시비를 시인의 제자와 후학들이 자비를 드려 세우겠으니 문협과 시에서 협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자기선전의 성격이 농후한 홍보성 선전막-선전탑은 도처에 걸리고 세워지거늘, 그것도 시군의 공적예산을 투입하여 제작되는 것이 다반사이거늘, 한 시인의 문학성을 기릴 수 있는 시비 하나 세우는 일이 이처럼 버거워서야 되겠는가 생각하였다.

 

절차로 따지자면, 본인이나 제자들이 나서기 전에 지자체나 문협에서 자발적으로 시비를 세우겠다고 나서야 도리에 맞는 일이다. 그것은 시인 본인의 문학성을 기리는 일일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산을 지역사회가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나, 지역사회에 문화-예술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주에는 몇 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덕진공원이나 다가공원 등에 몇 기의 시비가 자리 잡고 있다. 문화도시요 예향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빈약한 모습이다. 전북문협에 등록된 문인들이 600명에 달하며, 그 중에 시인이 300명에 가깝다. 출향한 문인이나 시인들을 망라한다면 그 수는 더 불어날 것이다.

 

세상에는 많고 커봐야 별로 좋을 것이 없는 경우도 있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도 있다. 거리를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는 각종 원색의 간판이나 계몽과 자기 홍보성 선전물들은 크고 많아야 좋을 것이 별로 없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시문학은 모든 문화-예술의 원천적 질료가 되는 장르다. 그런 시와 시정신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많을수록 좋으면 좋았지 나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느 지자체에서는 막대한 자체 예산을 투입하여 시비-조각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의 휴식과 문화 공간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로 하여금 대표작을 시비로 제작하는 데 공적예산을 지원하거나, 조각가들의 작품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구입·전시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조성된 시비공원이나 조각공원에 가보면 자연 경관이 주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시비에 새겨진 시나 조각 작품의 조형미가 주는 아름다움이 그 도시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한다. 그런 미감이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하여 나그네의 발길을 의미 깊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비가시적 성과를 경제적 생산효과로만 재단하여 폄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정선되지 않은 시비나 조각 작품이 무분별하게 세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차제에 <시비건립심의위원회(가칭)> 같은 기구를 발족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시인을 대표하는 전북문인협회와 미술계의 대표가 참여하고, 누구보다도 전라북도와 각 시군의 문화·예술 담당자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깊이 있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동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