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원작에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가미돼 눈길을 놓기가 힘들다. 드라마 세트장이 설치된 부안과 완도에는 관광객이 넘치고 덩달아 땅값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시청률이 각각 30%를 넘으니 역사극 치고는 크게 성공한 셈이다.
더군다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교과서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등 국민들의 편치 않은 심사와 맞물려 인기가 꽤 오래갈듯 하다.
이들 드라마는 이순신과 해신 장보고를 인간미있는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시청자들이 이들 드라마에 빠져드는 이유는 뭘까. 물론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영웅성과 함께 시대적 배경도 한몫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 미국과 중국 일본 등에 둘러싸여 곡예를 타야 하니 말이다. 그런 틈바구니를 호쾌하게 헤쳐나가는 영웅성에서 대리쾌감을 얻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이 활약하던 임진왜란(1592년) 시기는 국론이 극도로 분열되었다. 가도입명(假道入明)을 구실로 일본은 7년 반동안 조선을 약탈과 방화로 짓밟았다. 당시 인구 200만여명 가운데 수십만명이 도륙당해 머리와 코 등이 베어지고 도공과 미녀 등 수천명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런데도 조정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중국의 원군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조선의 처지가 어떠했는가는 일본과 중국의 화평(和平)교섭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쟁 발발 1년후에 시작된 교섭에서 중국은 삼사(三事)를, 일본은 칠조건(七條件)을 요구한다.
삼사는 “일본군은 조선 전지역에서 철수하고, 포로로 잡힌 두 왕자를 송환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항복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이다. 또 칠조건은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비(妃)로 삼는다. 조선의 남부 4도(道)를 일본 점령하에 둔다. 조선의 왕자 한사람을 인질로 일본에 넘긴다.”등이었다.
문제는 이들 교섭이 정작 장본인인 조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주목을 끄는 대목은 조선 8도중 남부 4도를 일본이 점령한다는 것이다. 이미 400년전에 남북분단의 전조(前兆)를 보는듯 하다. 최근 미국과 중국 일본 등에서 흘러나오는 ‘한반도 3분할론’과도 맥락이 닿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다행히 이순신이 23전 23승으로 제해(制海)권을 쥐고 있어 이들의 수작은 미수에 그쳤다. 나아가 이순신은 일본 정벌까지 꿈꾸었다. 일본의 침략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일본의 주력부대가 조선에 묶여있는 사이 일본 본토를 치자는 생각이었다. 이는 그가 올린 장계에 잘 나타나 있다.
완도 호족이었던 장보고 또한 청해진(828년)을 배경으로 종합무역상사를 경영한 글로벌CEO였다. 당(唐)에서 군인으로 출세했으나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다 노예로 파는 것에 분개해, 청해진을 연 것이다. 그리고 한중일 동북아를 하나로 묶어 해상을 주름잡았다. 작가 최인호는 장보고를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 비춰 그를 해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실제로 장보고는 일본에서 신으로 추앙받고 중국 산동성 석도시 적산법화원에 궁궐같은 기념관과 높이 8m의 동상으로 우뚝 서있다.
이들 두 인물은 숨바쁘게 돌아가는 국제정치의 역학속에서 우리에게 민족의 자존과 정체성이 어때야 하는지를 묻는다. 이순신탄신일과 장보고기념관 개소식을 접하며 불현듯 떠오르는 상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