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속성을 잘 알고 있는 데가 바로 방송매체이다. 소위 시청률 지상주의라고 불리는 과열경쟁이 바로 이러한 자극성의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경쟁은 특정 장르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드라마, 시사, 코미디, 뉴스 등 방송의 전 장르에 걸쳐서 시청률은 프로그램 제작자의 목을 옥죄는 족쇄가 된 지 오래다.
시청자와 제작자의 관계에서 손쉽게 거래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가학성’이다. 남의 불행을 통해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논리는 시청자와 제작자 모두에게 커다란 유혹이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쉽게 재미를 느낄 수 있어서 좋고 제작자 입장에서도 쉽게 제작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거래에서 정신적 건강함이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염려에 있다. 스포츠라고는 하지만 달리 보면 로마시대의 검투사 결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프로그램에서 과연 정신적 건강함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 성우가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게임 도중 기도(氣道)가 막혀서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개그맨 한 사람 역시 오락 프로그램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흔히 이런 일을 프로그램 제작자의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는 가학성을 통해 얻어내려던 시청률 지상주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청률은 바로 시청자들이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우리들 역시 그러한 연예인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가학성의 문제를 극복해가고 있는 장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코미디 프로는 웃음의 기폭제로 사용되었던 유일한 수단이 폭력성이라고 할 만큼 그 비중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때리고 맞는 동작으로 마무리되는 코미디는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다는 점에서 크게 달라졌다. 이러한 결과의 저변에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한 시청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제작자가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