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번역과 반역

‘번역은 반역’이란 말을 들은 지도 오래 되었다. 이 표현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만큼 이 표현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기실은 이탈리아 속담이라고 한다.

 

번역은 또 다른 창조 작업이다. 원문이 갖고 있는 행간의 의미를 풍토가 다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번역이 아닌 통역의 경우이지만 이런 문화적 차이를 말로 옮기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는 일도 적지 않다. 미 군정시절에 통역을 맡았던 이가 난감한 처지에 빠졌단다. 미국 사람이 들었으면 모두 웃을 수 있는 표현을 한국 사람들에게 전달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통역관이 이렇게 그 의미를 전달했다고 한다. ‘모두 웃어 주십시오’

 

같은 장르에서 문화적 차이를 글로 옮기는 번역 작업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우리 풍토에서 번역 작업은 환영 받을 일이 아니다. 원저자의 허락을 번역하는 이가 직접 주선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만큼 번역 작업에서 해야 할 일은 많다. 그나마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시사적인 내용일 경우는 시간과의 싸움을 겪어야 한다. 한 사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은 누가 먼저 번역해 내느냐가 관건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번역은 환영받지 못하는 분야 중 하나로 분류된다. 이러한 풍토는 다시 반역이라고 할 수 있는 번역 작품을 양산하게 한다. 반면 번역 작업이 커다란 기여를 한 사례로는 M.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한 것을 들 수 있다. 번역을 통해서 독일어가 갖고 있던 표현의 영역을 한껏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기자들이 200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 준비상황을 점검하고자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이 독일어로 접한 한국 문화은 여전히 어설프기만 한 모양이다. 질적인 문제를 따지기 전에 양적으로도 빈약한 현실을 지적했다고 한다. 그리고 번역팀을 한국에서 선발하는데, 독일에서 직접 번역자를 선발해서 번역시키는 방안이 좋을 것 같다는 독일 출판계 사람들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독일어라는 이질적인 언어에 한국문학이 스며드는데 백년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한국문학의 대부로 불리는 함부르크 대학 한국학과 베르너 자세 교수의 언급은 새겨들을 만하다. 앞으로 70년은 더 지나야 한다니 작가들의 노고를 지켜 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