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여름비가 오락가락 했다. 빗방울이 포도 알 만한 크기로 내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갰다. 짐이 되는 우산을 놓고 나섰더니 가로수 사이로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다시 떨어져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할머니 한 분이 보도블록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하기에 가까이 가보니 정신없이 쌀을 쓸어 모으고 있었다. 쌀자루에 구멍이 뚫렸던지 제법 멀리까지 하얀 줄을 긋고 떨어져 있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든 손이 바삐 움직였지만 블록에 틈새가 있어서 쌀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고 비는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었으면 흘린 쌀을 보고 그리 안타까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연배의 어른들에게 쌀은 곧 목숨이었다. 배고픔을 몸소 겪으며 살았고 쌀 몇 톨, 밥 알 몇 개만 함부로 해도 야단을 맞은 세대이다.
목숨 같던 쌀이 홀대받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지천이어서 사람들은 쌀 귀한 줄을 모른다. 전에 들었던 우스개 소리 하나가 있다. 아이에게 옛날엔 쌀이 없어서 굶을 때가 많았다는 말을 했더니 빵이나 라면을 먹지 왜 굶었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다. 쌀 소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서양 음식에 길들여지고 인스턴트식품과 친하다. 외국산 밀가루로 만든 먹거리가 주변에 흔하고 이 땅에서 나오는 쌀이 아니더라도 굶을 걱정이 없다. 더 싼 값의 외국 쌀이 손 내밀면 닿을 곳에 있다. 중국산 찐 쌀로 밥을 하는 식당도 있다고 한다. 쌀 한 톨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농부의 손이 몇 번 갔고, 여러 사람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밥상머리에서 하던 교육도 사라졌다.
아직은 벼가 자라고 익어가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지만 아름다운 들판을 보는 마음은 개운치 않다. 추수하기 전에 농부가 자식 같은 벼를 갈아엎었다는 소식을 종종 전해 듣는다. 넓은 땅에 사는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농부가 자신이 키운 농산물을 ‘자식 같다’고 표현하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좁은 농토지만 날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살뜰하게 보살피고 빗소리만 크게 들려도 삽 들고 쫓아나가는 정성으로 쌀 한 톨을 키운다. 그리고 추수가 끝나면 도시에 사는 자식이나 지인에게 쌀을 보내느라 분주하다. 사랑과 정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쌀은 배만 채우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아직도 결식아동이 있고 세상 한 쪽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배고픔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된 시간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쨌든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쌀은 귀하다. 그러나 생명 창고인 농촌은 황폐화 되고 노령화 되어서 힘없이 주저앉고 있다. 식량 자급을 하지 못하는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쌀은 생명이다. 농촌을 살려야 하고 쌀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곧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다. 예전 같으면 마을마다 윤기가 돌 계절이다. 그러나 이제는 농촌 어디에서고 온기를 느낄 수 없다. 쌀농사가 흉작이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풍년을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 세상이 암울하다.
/한경선(글짓기 논술지도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