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는 우리나라 최초의 향가다. 백제 30대 무왕(재위 600-641년)인 서동(薯童)이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기위해 만든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두(吏讀)로 표기된 이 노래는 원문과 함께 설화가 삼국유사에 실려 전해온다.
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선화공주님은/남몰래 얼러두고/맛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서동은 고구마 비슷한 마를 비롯 산약과 나물을 캐서 생활하는 소년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다. 초동(樵童) 목동(牧童)등과 마찬가지다.
이 노래에 대한 해석이나 배경은 구구하다. 백제와 신라간의 혼인동맹이라는 정치적 해석도 있다. 또 백제 멸망후 미륵사 승려들이 절을 구하고자 신라와 미륵사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지어낸 것이라는 연기(緣起)설화도 설득력을 갖는다. 백제의 스러진 꿈인듯 서 있는 미륵사는 무왕이 선화공주의 청으로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 모두 백제에 관한 명쾌한 사료가 부족한 탓이다.
서동은 정확한 출생년도를 모를뿐 아니라 출생지도 분분하다. 익산과 부여가 서로 자기 고장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27대 위덕왕의 아들(庶子)인지 29대 법왕의 아들인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의자왕이 그의 아들인 것만은 틀림 없는듯 하다.
이러한 서동을 둘러싸고 익산과 부여의 쟁탈전이 치열하다. 익산은 1969년부터 실시해 온 마한민속예술제를 지난해부터 ‘서동축제’로 바꿨다. 서동을 시의 상징인 캐릭터로 선정했고 서동선발대회와 뮤지컬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있다. 특히 경주에서 뽑힌 선화공주와 혼례식을 갖고 당시 백제와 왕래가 잦았던 일본과도 교류를 텄다.
이에 비해 부여는 2003년부터 서동과 선화공주의 만남 재현, 연극공연 등을 하고 있다. 또 서동이 마를 캤다고 주장하는 궁남지 일대 10만여평을 사들여 상징물을 설치하고 연못을 대대적으로 재구성했다.
이러한 때에 5일부터 1400년 전 당시를 배경으로 한 TV드라마 ‘서동요’가 50부작으로 방영된다고 한다. 대장금, 상도 등을 연출했던 PD작품인데다, 두 사람의 극적인 로맨스와 백제의 과학문명 등을 재현한다고 하니 관심이 크다. 다만 드라마 메인 세트장을 두고 익산과 부여가 경쟁을 벌이다 결국 부여로 넘어간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