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삼안코퍼레이션 회장 - 김형주①

내고향 '부안읍 옹중리'

어느날 갑자기 전북일보 기자가 찾아와서 자서전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써보자 했으나, 지금은 그럴 의사가 없다고 거절했다. 과거에도 자서전 권유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내 인생을 공개할 생각이 없어 거절해 왔던 터였다. 그러나 내 고향의 기간 신문인 전북일보는 나와의 인연이 깊어 차마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간략한 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적기로 했다. 너무나 여러가지 사연이 많아서 그것이 잘 표현될 지 모르겠으나, 그저 생각나는대로 적어나가니 부디 독자들의 혜량을 바란다.

 

나는 1923년 음력 9월6일 유시(酉時)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506번지에서 아버지 김字 홍字 술字, 어머니 김字 상字 윤字 사이의 6남 1녀 중 셋째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태어났다. 80평생 살아오면서 나를 세상에 보내주신 부모님께 항상 감사하며 살아왔고, 부모님 생애에 조금 더 효도하지 못한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엄격하신 부모님 슬하에서 곧고 착하게 살아왔다. 부안국민학교 시절엔 언제나 공부도 잘했고, 부모와 형제들에게 많은 귀여움도 받았다. 물론 항상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버님이 워낙 엄격하신 관계로 혼나고 울기도 많이 했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런 저런 일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어느 날이다. 동네아이들과 어울려서 정신없이 놀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어느덧 해가 저물고 말았다. 집에 들어갈 일이 걱정이었다. 아버님은 매우 엄하셨고, 자식들이 너무 늦게 귀가하면 크게 혼내셨다. 아버지는 저녁 늦게 귀가하는 나를 기다렸다가 고사리같은 손을 낚아채듯이 아래채로 끌고 가 회초리를 치셨다. "사내 놈이 규칙적으로 생활해야지, 왜 이렇게 늦는 거냐! 너는 좀 맞아야 겠다"며 호되게 매질을 하셨다. 나는

 

참다못해 그만 울음을 터트렸고, 매를 맞으며 엉엉 우는 손자녀석이 안쓰러운 할머니가 나오셔서 아버지의 매질을 말리셨다.

 

아버지는 3대 독자로 태어나, 6남 1녀나 되는 많은 자식을 낳으셨다. 그러다 보니 7명이나 되는 많은 자식들 하나 하나에 대한 큰 정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반듯하지 못한 언행을 하면 여지없이 회초리를 치셨다. 어려운 시절에 고된 농사일을 하며 하나, 둘도 아닌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을 기르는 아버지의 사랑은 엄격함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회초리 사랑을 존경한다.

 

아버지는 많은 농사를 지으셨다. 그 때문에 우리 집에는 일꾼도 여러 명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새벽 일찍 일어나 농사일을 비롯 크고 작은 집안 일들을 점검하고, 일꾼들과 함께 일을 했다. 식사는 정량만 드시고, 모든 생활은 근검하셨다. 한번도 편안한 생활을 하지 않고 안팎으로 뛰었다. 농번기 때에도 틈틈이 새끼를 꼬아 어려운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고생해서 꼰 새끼를 왜 동네사람에게 다 나눠주느냐"며 눈살을 찌푸리셨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어린 시절, 내게 가장 큰 슬픔이 하나 있다. 제일 큰 형님이 젊어서 돌아가신 것이다. 내가 학교에서 우등상을 타 오면 큰 형님은 동네 사랑방에 가서 "우리 형주가 우등상을 타왔다"며 한껏 동생 자랑을 하곤 했는데, 그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 것이다.(계속)

 

(프로필)

 

△23년 부안 △서울대 토목과 △미국 공병단 토목기술분야 수업 △제1회 기술고시 합격 △건설부 과장 △67년 삼안건설기술공사 창립 △한국수문학회 9·10대 회장 △한국엔지니어링진흥협회 7·8대 회장 △국제기술용역연맹총회(FIDIC)한국대표 △엔지니어링공제조합 초대, 2대 이사장 △충주댐 건설공로 대통령표창 △제22회 과학의 날 과학기술발전공로 산업훈장 △제35회 과학의 날 과학기술훈장 웅비장 △삼안건설기술공사 회장, 명예회장(현) △삼안코퍼레이션 회장(현) △송산 김형주장학회, 송산상 제정 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