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에서] 머리에 단풍들었네!

단풍이 참 곱게 들었다.

 

노랑과 빨강으로 현란하게 치장한 가을 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머리에 염색을 하던 아내가 금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염색을 그만두었다. 아마 게으른 탓에 염색시기를 맞추지 못하다 보니 희끗희끗 보이는 모습이 지저분하여 아예 염색을 포기한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아예 처음부터 염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염색을 도중에 그만 둔 아내는 머리 한 켠이 허옇게 드러나는 게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친구로부터 단풍이 곱게 들었다는 말을 들었단다. 가을 산 이야기로 알고 맞장구를 치다 보니, 어느 잡지에 나온 아내의 사진을 본 친구가 흰머리가 드러난 모습을 보고 그렇게 표현을 하더라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서 흰 머리가 마치 때맞추어 핀 꽃이나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무척 편안하더란다.

 

듣고 보니 그 표현이 참 곱고, 부드러워서 마음에 들었다. 같은 말이라도 표현에 따라서 듣는 사람에게 큰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싶었다. ‘너 흰머리 많이 늘었다.’고 하면 마치 힘겨운 인생살이에 지쳐버린 사람처럼 느껴져서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지겠지만, ‘단풍이 곱게 들었네!’하면 때맞추어 열심히 할 일을 한 상징을 드러낸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따뜻하고, 스스로 대견스러워 가슴이 활짝 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사람도 이럴진대, 아직 어린 아이들이야 오죽 더 하겠는가!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녀들의 사춘기는 자기자신보다 훨씬 유난스러워 보일 것이다. 그럴 때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유난스럽게 구느냐?’고 하는 것과 ‘너는 아빠, 엄마보다 훨씬 에너지가 많은 것 같다.’고 하는 경우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정서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예민한 사춘기의 아이들은 ‘누굴 닮았느냐?’는 말에 ‘그럼 내가 부모님의 아이가 아니란 말인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에너지가 많다.’고 하면 스스로에게 잠재된 힘과 능력을 암시받아 큰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가질 것이다. 옛날 어린 시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덕담을 해 주시곤 했다. 아직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들에게 ‘대통령감’이라거나 ‘장군감’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흔하게 듣는 말들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 그러한 말들이 너무 권력지향적이라거나 허무맹랑하다는 이유로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러한 어른들의 말씀은 권력을 잡으라거나 허풍을 떨라는 말씀이 아니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왕자병’, ‘공주병’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의 이러한 취향에 대하여서도 비아냥거릴 것이 아니라, 정말 왕자처럼, 공주처럼 살라고 덕담으로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뇌세포는 어렸을 때 기억된 내용은 더 오래가고, 나이가 들어서 겪은 일은 일찍 잊어버리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쇠퇴해지고 치매가 걸려도 어렸을 때의 기억은 남아서 아이처럼 된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들일수록, 젊은이들일수록 더욱 오래 기억될만한 일들을 만들어주고, 오래 기억되어도 유쾌한 말들을 자주 들려주어야겠다. 그래야 그들이 나이가 들어 머리에 단풍이 곱게 드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좋았던 기억들 속에서 따뜻한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오대규(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