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관찰자의 모순

우리는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을까. 굳이 동·서양을 비교하자면 외형적으로 서양적 사고방식이 조금 더 객관적인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성이 외형으로만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한의학처럼, 서양 의학이 보기에 허술한 듯한 동양적 사고(思考)가 더 현실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매사가 그렇겠지만 얼굴을 맞대고 만나 특정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객관성이란 잣대를 설정하기는 정말 어렵다. 달리 말하면 결론을 얼추 내려놓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악의성을 전제로 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언론에서는 이처럼 얼굴을 맞대고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인터뷰(interview)라 하기도 하고 면접, 대담, 회견 등을 들춰보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넓은 의미로는 조사·진단·시험·취재 등의 목적으로 특정한 개인·집단과 대면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조사기술로서의 면접법은 자발적으로 의견을 말하게 하는 식의 임상적 연구에서 행해지는 비지시적은 자발적으로 의견을 말하게 하는 식의 임상적 연구에서 행해지는 비지시적 면접(nondirective interview)과, 질문지나 테스트지 등을 이용하여 행하는 지시적 면접(directive interview)으로 대별된다.’

 

면접 또는 인터뷰에 대한 언어학적 접근 역시 신문방송학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학에서는 이런 면접과 관련해서 관찰자의 모순(observer‘s paradox)이란 용어가 있다. 면접을 시도하면서 아무리 객관성을 유치하려 애를 쓴 들, 실제로는 자신이 아는 만큼 혹은 말 할 줄 아는 만큼만 들린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러한 관찰자의 모순은 의도적 또는 악의적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이상적인 설정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면접이 학문적인 선언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웬만큼 알고 또 경험하기도 했을 것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전달했던 내용이 방송에서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활용(?)되는 묘기를 목격한 사람들은 사실만을 추구하고 전달한다는 언론의 구호가 얼마나 가식적인지를 체감한다. 윤리적 경계를 넘어가면서 취재한 결과물의 윤리를 언급했던 방송물을 두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남을 욕하기보다는 나에게 허물이 없나 다시 한 번 돌아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