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뿐 아니라 태양에 무엇이 가려 금이 그어지는 현상이 그림자(옛말로는 ‘그르매’ 혹은 ‘그리메’)요, 그것이 완전히 가린 부분을 ‘그늘’이라 일컫지 않은가. 어떻든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의 ‘그리다’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고 할 때의 ‘그리다(慕)’가 어원이 같다는 사실이다.
설혹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형체가 있고, 후자는 그것이 없다는 것뿐으로, 옛 문헌에는 성조(聲調)까지 동일하게 나타남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백지와 같은 마음의 벽에 누군가에 대한 느낌을 금을 긋듯 새겨두는 일이다. ‘그립다’라는 말은 상대의 모습을 자꾸 그리고 싶다. 또는 새겨 둔 그 모습이 새록새록 자꾸 생각이 난다는 뜻이다.
상대가 마음에 들면 들수록, 또는 그와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새겨진 그 금의 수효는 더 많아지고, 그 금의 형체도 더욱 또렷해질 것이다.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그냥 갈까/그래도/다시 더 한 번.
김소월의 ‘가는 길’이란 시에서 ‘그립다’는 말이 제 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다. 마음속에 새겨진 무형의 흔적이 바로 그리움인 이상, 그 그리움은 당장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임은 갔어도 그 임의 그림자만은 영원히 내 가슴속에 붙잡아 둘 수 있다. 따라서 그리움이란 그 생명이 영원할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움의 연속체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