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출신으로 언론계 큰 족적을 남긴 조선일보 이규태(李圭泰ㆍ73) 전 논설고문이 25일 오후 4시15분 지병인 폐암이 악화돼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 1983년 3월1일 조선일보에 '이규태(李圭泰) 코너'를 연재하기 시작해 만 23년간 모두 6천702회를 써 한국 최장기 연재기사 집필 기록을 세웠다.
병상에서 구술로 쓴 마지막회가 23일 조선일보 1면에 실렸으며 이 글에서 고인은 연재에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감사의 뜻과 함께 독자에게 고별 인사를 남겼다. 고인은 2월11일 '책찜질 이야기'를 사실상 마지막 글로 장식한 뒤 마지막회를스포츠조선에서 엔터테인먼트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이사부 씨에게 미리 받아적게 했으며, 죽음을 며칠 앞두고 독자에게 고별 인사를 전했다.
이규태 전 고문은 수치상의 기록 말고도 우리 언론계는 물론 한국학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68년 '개화백경(開化百景)'을 신문 전면에 60회 연재한 데 이어 1975년부터는'한국인의 의식구조'를 통해 한국인 심성의 원형을 파헤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밖에도 '6백년 서울' 등 모두 37개의 대형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집필했다.
저서로도 '한국의 인맥' '서민한국사' '민속한국사' '한국인의 조건' '서민의의식구조' '선비의 의식구조' '서양인의 의식구조' '동양인의 의식구조' '리더십의한국학' '역사산책' '한국인의 생활구조' '한국인의 정서구조' '李圭泰 사랑방이야기' '뭣이 우리를 한국인이게 하는가' '李圭泰의 환경학' '한국인 이래서 잘산다 이래서 못산다' '한국인의 음식문화' 등 120여 권에 이른다.
고인은 책에 대한 욕심과 왕성한 독서열로 고금의 역사와 동서의 문물을 두루꿰고 있었으며 독특한 자료 분류법을 창안해 글쓰기 자료를 정리했다.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마지막 박람강기(博覽强記)형 기자로 꼽혀왔다.
그는 이름 석자와 함께 김도원 화백의 캐리커처로 얼굴까지 널리 알려진 이른바'스타 기자'였지만 외모에 신경쓰지 않고 소탈한 생활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이발소에 가지 않고, 주례 서지 않고, TV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삼불(三不) 원칙'은 지인 사이에 소문나 있다.
고인은 전주사범학교와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군산상고 교사를 거쳐 1959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입사 이후 문화부ㆍ사회부 기자 등을 거쳐 초대 월남특파원으로 일했다.
전북일보가 뽑은 ‘20세기 전북인물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던 그는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정전 암흑속에 좀도둑도 없었다’는 제목의 현장 사설로 국민적 성원을 끌어내기도 했다. 지난해 10월1일 세계서예전주비엔날레 개막식에 참가한 것이 고향에 마지막 보여준 고인의 모습이었다.
조선일보 문화부장과 사회부장, 주간조선 주간, 편집국 수석부국장, 논설위원,논설위원 실장, 이사주필, 논설고문 등을 지냈고 한국신문상과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