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창조성’에 기반한다고 한다. 조금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문화의 힘을 창조의 힘이라고 전제하기로 하자. 문제는 이 ‘창조성’이 어떤 상태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또 더 근본적으로 ‘창조성’은 개발되거나 지원될 수 있을까? 문제는 한국 상황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수많은 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비록 부족하지만 존재하고 있고 문화콘텐츠 업체에 대한 지원금이 막대한 액수로 뿌려지고 있지만, 이러한 정책적 지원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 별반 없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말하자면 ‘창조성을 만들어내는 정책’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자면 대부분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정책의 기대 예측이 번번히 빗나가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문화를 다루는데 있어 문화 생산과 향수에 관한 사람들의 욕망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창조성’은 근본적으로 ‘불안한 존재 위치’로부터 기원한다. 창조적인 사람은 창조성에 대해서 학습하는 사람이 아니다. 창조적 행위는 안정적인 기반에서 벗어나 있는 주변적 위치와 상관적이고, 변화의 욕구에 의해서 가동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문화)정책이 움직이는 방향은 대부분 ‘안정화’와 ‘시스템’을 만들려는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는 창조의 힘을 평준화시킨다. 특히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민간의 욕망조차도 대부분 같은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라고 할 때 그 정책의 제도적 속성은 과정 속에서 매우 강화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 한 사례를 최근의 ‘복권사업’에서 본다. 최근 사회양극화 문제가 의제화되면서 대부분의 예술 정책도 ‘사회복지적 틀’ 속에서 조율되고 있다. 어느새 예술은 ‘치유’의 힘으로 국한되어 버리고 있고, 예술이 치유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강조 속에서 예술은 아주 부드러워지고 있다. 예술이 가진 적나라한 존재를 드러내는 힘, 현실을 넘어서는 불편한 힘이 사회적 필요와 일대일 대응관계로 조율될 때, 예술은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조차 생기게 된다.
그래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원은 근본적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지금의 관행적인 지원틀을 깨고 창조력을 기반을 강화하는 지원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문화정책은 실패할 것이다. 문화정책에서 창조력을 지원하는 의미를 숙고할 때가 되었다.
/전효관(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