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생계 문제가 절실하게 다가왔다. 당시 이미 만 25살의 나이였으므로 경제적으로 자립한 생활인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내 손으로 벌어서 먹고살 수 있어야 운동도 제대로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옥피방석’ 장사였다. 옥피방석이란 강원도의 특산물로 옥수수껍질을 엮어서 짠 방석인데, 강원도에 사는 친구의 소개로 이것을 가져다 팔았다. 그러나 세상물정 모르고 난생 처음 돈벌이를 시작한 청년에게 장사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치 않은 법, 그 당시로서는 거금인 300만원을 고스란히 날리고 망하고 말았다.
장사에 실패한 이후, 세탁기술을 배우려고 군산에 있는 세탁소에 취직했다. 81년 12월 무렵의 일이다. (그 때 익힌 경험으로 지금도 웬만한 옷가지는 혼자서 직접 다려 입는다.) 그러나 세탁소 ‘시다’ 생활도 얼마 가지 못했다. 경찰과 기관원들이 수시로 세탁소에 드나들며 당사자인 나는 물론이고 주인아저씨까지 성가시게 해대는 통에 민망해서 더 이상 머물고 있을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세탁소를 나온 이후 이리(익산)직업훈련원 공작과에 입학하여 선반기술을 배우게 된다. 선반기술을 배워두면 생계해결 뿐 아니라 장차 노동현장에 진출하여 노동운동을 하는 데에도 유익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직업훈련원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선반기술을 익혀서 ‘기능사 자격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던 81년 10월 무렵, 느닷없는 예비군훈련 소집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소집통보를 받고 찾아간 동사무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예비군훈련이 아니라 보안부대 수사관들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보안대 지하실에서 발가벗겨진 채 얻어맞고 고문을 당하면서 비로소 내가 ‘좌경의식화조직’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1년 여름께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 김종철 군에게 사회과학 서적 몇 권을 권해 주고 함께 토론을 한 적이 있었는데, 공안기관이 이것을 빌미로 대규모 조직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기를 반쯤 남긴 84년 봄 이른바 ‘유화국면’ 당시,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왔다. 두 번째 징역살이였다.
이 때의 감옥생활 중에 나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였다. 80년 광주의 처절한 희생을 거울삼아, 특정지역에 고립되지 않은 전국적인 범위에서의 국민항쟁을 조직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각 지역의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하여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끄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84년 출옥 직후부터 지역 내 민주화운동의 어르신들과 선배 활동가들을 찾아뵙고 “탄압에 노출되는 한이 있더라도,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서 대중과 함께 투쟁하며 대중을 조직화할 구심점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여쭙고 다녔다.
드디어 84년 8월 27일, 전국 최초의 지역운동조직인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가 창립대회를 열었다. 오랜 동안 숨죽이며 비공개활동에 치중했던 각 부문의 민주화운동세력이 당당하게 한자리에 모여 대중적인 투쟁을 선포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렇게 전북지역에서도 일찌감치 민주대항쟁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