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각 지역의 주요 조직들로는 전남민청협(창립 84.11.8, 대표 정상용 전 국회의원), 인천사회운동연합(11.19, 이호웅 현 국회의원), 경북민주통일국민회의(85.1.31, 이강철 현 대통령 정무특보), 충남민협(2.4), 부산민협(5.4, 김재규 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이호철 당시 홍보국장) 등이 있었다. 이후에도 충북, 강원 등 모든 지역에서 지역민주화운동 조직들이 속속 창립됐다.
전북민협 창립을 주도했던 나는 창립 6개월 후부터 사무국장, 상임위원장으로 88년까지 활동하면서 전북지역의 민주화투쟁을 이끌어 나갔다.
민통련 출범 직후, 전북민협 사무국장이었던 나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민주화 투쟁을 기획하고 전개해 나갔다. 전주 카톨릭센타 강당에서 공개적으로 5월 문화제를 개최하고, 5.18 관주학살 사진전, 비디오상영, 5,18증언, 강연회 등을 개최, 이전보다는 훨씬 더 새롭고 대중적인 방식을 통해 5.18 학살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민주화투쟁의 대중적 확산을 꾀했던 것이다.
당시 카톨릭센타 강당에서 개최됐던 5월문화제는 상당히 대중적이어서, 지나가는 꼬마아이들조차 “왜 찔렀니? 왜 쏘았니?.... 피!피!피!”하면서 ‘5월의 노래’를 따라 부를 정도였다.
이처럼 대중적으로 확산됐던 민주화투쟁은 그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일명 ‘소몰이투쟁’으로 연결된다.
소몰이투쟁은 85년 소 값 폭락에 따라 농민들의 생존이 어렵게 되자, 정권유지에만 혈안이 돼 있던 군사독재정권에게 농민 생존대책 수립과 민주화 조치를 함께 요구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소몰이투쟁은 고산에서 시작해서 진안을 거쳐 마지막으로 부안 등용리의 한 성당에서 무자비한 백골단의 폭력에 의해 처절하게 진압될 때까지 13개 시군을 돌며 성황리에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농민들이 소를 몰고, 학생, 청년, 종교인과 함께 전라북도 13개 시군을 돌며 행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던 소몰이투쟁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어떤 때는 행렬만 해도 1km가 넘을 정도였고, 장날을 끼고 소와, 사람과, 때로는 경운기까지 나서서 행렬이 이뤄지다 보니, 경찰들도 막을 엄두를 못 냈다. 행여나 막을라치면 소와 사람이 엉켜서 뛰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될까 겁부터 나는 통에 시위를 막을 생각조차 제대로 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농민뿐만이 아니었다. 생존권 보장과 민주화 요구가 함께 결합된 노동자들의 투쟁도 당시에는 활발했다. 백양 메리야스, 세풍제지, 아세아스와니 등 전라북도 주요 공장현장에서 벌어진 노동자 투쟁은 청년, 학생, 시민이 함께 하는 연대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처럼 농민들의 문제를 농민에게만 맡겨 두지 않고, 노동자들의 문제를 노동자에게만 맡겨 두지 않고 다 함께 연대해서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서 생존권의 문제가 민주화의 문제와 결코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라는 것과, 모두가 함께 연대하면 훨씬 더 큰 힘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때에도, 나는 소몰이투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유일하게 진안경찰서에서 열흘 동안 구류를 살게 된다. 유치장이나 감옥의 차가운 마룻바닥이 그야말로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소몰이투쟁과 노동자투쟁으로 뜨거웠던 85년이 가고, 86년은 1년 내내 민주헌법 쟁취 개헌투쟁이 전개된다. 소몰이투쟁을 통해 13개 시군으로 확대된 지역적 기반과 농민, 노동자, 청년, 학생, 종교인, 시민 등 부문이 결합된 연대투쟁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87년 민주대항쟁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