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나라를 잃는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조선의 선비 매천(梅泉)황현(黃玹)은 “조선이 선비 기르기 5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사람도 죽는 이가 없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 가”하는 유서와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는 유서에서 “내가 위로는 하늘이 지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책 속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매천의 자결 명분은 다름 아닌 선비의 도리다. 필자는 조선이 5백년을 지탱해온 힘이 바로‘딸각발이 정신’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매천이 더덕술에 아편덩이를 타마시고 죽기 전에 써놓은 절명시에도 그의 선비정신이 드러나 있다.
“새와 짐승도 갯가에서 슬피 운다/ 무궁화 이 나라는 영영 사라졌는가/ 가을 등불아래 책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지식인(선비) 노릇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3수)
그런데 한국에는 선비정신을 가진 이른바 ‘선비정치가’가 없다.
필자가 언론인으로 생활하던 30여년동안 이나라에서 만난 정치인중에 ‘선비 정치가’로 불리던 어른이 한분 있었다. 그가 바로 전북 김제 출신인 운재(芸齋) 윤제술(尹濟述)선생이시다. 운재는 부안 계화도 간재(艮齋)전우(田愚)문하에서 김병노, 소선규등과 서당공부를 하다가 중동중학에 들어갔다. 1929년 동경고등사범 영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중동 교사를 시작으로 보성, 성남중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해방과 함께 문을 연 남성중고교 교장을 끝으로 교직생활을 청산하고 1954년에 김제 을구에서 3대민의원 의원에 당선,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후 6선,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운재는 1965년 한일협정 비준당시, 그것이 굴욕외교라고 국회의원직을 걸고 한사코 반대하다 끝내 의원직을 내동댕이친 정치인이다.
1983년 2월, 정치활동 규제자 1차 해금 때 소감을 여쭌 필자에게 운재선생은 “내가 묶여 있었는지 조차 몰랐다”면서 “해금(奚琴)은 우리나라 고유 악기인 깡깡이”라고 조크까지 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심정을 단종 때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의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어찌 봄이 관여 할 수 있으며/ 구름이 가고 온들 산은 다투지 않는다”(花開花謝 春何管/雲去雲來 山不爭)는 싯귀에 비겼다. 서울 누상동에 있는 운재댁은 정치인들의 사랑방이었다. 한번은 취재할 일이 있어 누상동에 올라갔는데 운재 선생은 붓글씨를 쓰고, 류청·조연하씨가 흑백전쟁(바둑)을 하고 있었다.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 를 쓰시다가 필자의 인사를 받더니 붓을 놓고 “자네, 잘 왔네” 하시고는 “굴원의 생각(청렴)이 옳은가, 어부의 생각(타협)이 맞는가”하고 묻는 것이었다. 필자는 감히 “성인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 같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하고 말씀드렸더니 운재 선생이 “옳지! 글씨 임자가 따로 있었구만”하시면서 낙관을 해 내게 주셨다. 운재 선생은 1936년 서화협회전에 출품, 당대의 명필 김돈희·오세창 등과 함께 당당히 입선한 서예실력도 가지고 있다. 5월31일 지자체 선거를 앞둔 이 정치시즌에 필자는 “정치는 신의야. 신의를 지켜야 해. 국민으로부터 신의를 잃으면 민심도 떠나는 법이지”하시던 ‘선비정치가’운재 선생의 말씀을 되새기고 있다. 어부사(漁父辭)>
/이규일(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