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3월 31일, 장지연(張志淵) 윤효정(尹孝定) 등이 국민의 교육과 계몽을 통해 독립·자립·자존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를 조직했다. 이에 전북인으로서는 해학 이기(海鶴 李沂)가 가담했다.
당시 이준(李儁)이 이끌어오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혁신 확장했던 자강회는 이날 회장에 윤치호(尹致昊)를 추대하고, 정부에 ①의무교육 실시 ②악질적 폐습 엄중금지 ③색깔 있는 복장착용 ④단발령의 강력시행 등을 건의했는데 이중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교육과 민중계몽운동이었다.
그 이유는 외국의 간섭을 안받는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을 통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민족적 주체의식을 갖게 하고 독립자존(自存)의 힘을 배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자강회에서는 1906년 7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할 때는 YMCA회원들과 합세, 약 2천여 명이 대한문 앞에서 대대적인 반대데모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