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국회의원 이광철 - 세여자 이야기2

20년간의 신혼 생활

두 번째 여인은 내 아내 소성섭 여사(?)다. 겉보기엔 여리고 약해 보이지만, 속마음만큼은 한없이 강한 여인. 바로 내 아내다.

 

한가하게 연애나 할 때냐며 핀잔이나 주고, 행여나 결혼하면 삶의 가치관이 변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손 한번 제대로 잡아주지 않았던 나를 기다리며 그녀는 무려 7년이라는 긴 세월을 견뎌냈다. 그것도 모자라 집안의 반대마저 물리치고, 아무 직업도, 가진 것도 없었던 나와 선뜻 결혼해 주었다.

 

좋은 세상 만들겠다는 핑계로, 조금은 무모해 보이기조차 했던 신념 때문에, 한 번도 생계에 보탬이 되지 못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배에, 투옥에 시달려야 했던 못난 남편을 그녀는 한번도 탓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묵묵히 생계를 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혼자서 낳고, 혼자 길러냈다.

 

딸아이를 임신했을 때, 6개월째부터 조산기가 있어 두 달을 병상에 누워 있었고, 아홉 달도 안 된 2.45kg짜리 미숙아로 황달까지 안고 태어난 딸아이를 살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했었던 그녀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생후 한 달밖에 안 된 갓난아이가 목 근육이 뭉쳐서 그냥 놔두면 목이 틀어지는 ‘사경’이라는 병 때문에 이틀에 한 번 꼴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을 때조차도 그녀는 묵묵히 잘도 견뎌냈다.

 

하늘이 도왔던 것인지 갓난아이의 병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 치유됐을 무렵, 그녀는 드디어 만성 간염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토록 강했던 그녀의 육신과 영혼마저 감당해 내기 힘든 ‘시련의 계절’이었던 것이다.

 

이때가 1992년의 일이다. 90년 초부터 92년까지 수배를 당해 피해 다녀야 했던 나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해진다.

 

딸아이를 낳고, 딸아이 병간호를 할 때, 말하자면 진정으로 남편이 있어야 했을 때에는 수배로 인해 집에 없었고, 수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남편노릇 좀 하나’ 싶었을 때에는 중병으로 친정에서 요양을 해야만 했던 그녀의 삶을 나의 이 때늦은 미안함이 조금이나마 씻어줄 수 있다면, 나로서는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그랬다. 우리는 1987년에 결혼해 20년을 부부로 살았지만, 정작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국회의원이 된 지금에 와서까지 ‘주말부부’로 살아가고 있으니, 평범한 부부로 산 날을 모두 합하면 잘해야 3~4년이 채 안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20년 가까운 부부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서로 간에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측은지심’ 때문이다. 그녀는 ‘시대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남편이 불쌍했고, 나 또한 항상 미안하고 죄스럽기만 했던 까닭에 부부싸움이란 원초적으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떨어져 지내다 보니 우리는 20년 동안 ‘신혼부부’였다. 언제나 만나면 새로웠고, 떨어지면 절실히 그리워했으니 그야말로 신혼부부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결혼 10년째였던 96년 어느 날 구치소에서 아내에게 썼던 편지의 첫 대목으로 신혼의 달콤함(?)을 전해 본다.

 

그리움에 지쳐버리면 그리움을 잊어버릴까 했는데도 그리움에 지치면 지칠수록 더욱더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먼 걸음이라 그립다는 이야기도 마음 놓고 해보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 때문에 모든 일 팽개치고 여기 왔다 가면 공허감에다 피곤함까지 겹쳐 아프지 않을까? 더 서글프지 않을까 등등의 이유로 그립다는 말 못했는데, 오늘은 그립다는 말로써 편지를 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