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전주안디옥교회 원로목사 이동휘 - 일본 탄압에 맞선 교회

외조부로부터 내려온 신앙의 물줄기

외할아버지는 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훈장이셨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구원과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신 후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열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사시다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집에서는 자녀들에게 성경을 암송하도록 하고 철저한 신앙훈련을 시키신 주원선 외할아버지. 나는 외할아버지를 뵌 일이 없지만, 진리의 샘물을 발견하시어 우리 가문을 명예롭게 하신 분이다.

 

이 복음을 우리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보(家寶)로 안고 오셨다. 신앙과는 먼 우리 이씨 집안에 복음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아버지는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는 일생을 사시다가 98세로 세상을 떠나셨고, 일가친척 모두가 예수님을 섬기는 행복을 누릴 뿐 아니라 교회의 중직과 성직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어머니의 끈질긴 가족 전도로 우상을 모르는 가문이 되었고, 어두웠던 암흑시절에 개화된 가정으로 많은 혜택을 누렸다.

 

따라서 나는 날 때부터 모태신앙인이 되었고, 학교와 집 그리고 교회밖에 모르는 숙맥이 되었다. 신앙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세상을 모르는 외톨이의 적막함을 견디어야 하는 어린 소년의 아픔도 있었다. 행복인줄 모르는 어리석은 푸념이 다행히 반항으로 발전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그러나 그 신앙의 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회자의 길을 가는 일생에 필수적인 요소를 형성시켜주었다. 나는 그것을 목회자가 된 후에야 알았고 신앙의 부모님을 만난 행복을 감사, 또 감사했다.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가혹했다. 신사참배 강요로 순교 당하고 투옥되고 기독교 목사 장로는 8월17일에 모두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2일전 해방을 맞는 신기한 도움도 받게 되었다. 나 자신도 장로가정의 자녀라는 이유로 초등학교를 삼수(三修)로 들어가야 하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우리 형님이 초등학교 재학 중에 온갖 치욕을 다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사에게 절하지 않은 골칫거리의 동생을 쉽게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교회는 참으로 민족사회에 큰 기둥이 되었다. 한글 말살운동을 집요하게 강행했는데도 교회는 해방되는 날까지 한글을 가르쳤다. 따라서 교회 다니는 아이들은 다 유식했다. 성경을 읽어 진리의 길을 걸었고, 문명을 소개하는 한글 책자를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용어로 선각자의 대열에 서 있게 된 것이다. 또 모든 애국지사들이 교회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분들의 강연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영향으로 나는 나이 어린 그 시절 애국심이 강한 소년으로 자랄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종교 탄압은 극도에 달했다. 그러나 온갖 간섭과 탄압에도 교회는 더 강해졌고, 나라를 위한 기도를 뜨겁게 하면서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하나님의 해방을 소망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일본은 망한다고 확신했다.

 

나는 유년시절에 다른 사람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행복을 누리며 살았다. 선조가 닦은 견고한 대로를 달리는 격이었다. 유족한 가족 형편으로 굶주림과 당시의 헐벗음도 피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좋은 유산을 누리며 살뿐 아니라 후손에게 이 보배를 유산으로 계승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왔다.

 

 

◇프로필

 

△1935년 8월 1일 완주군 조촌면 용정리 출생

 

△조촌초등학교, 신흥중·고,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졸업

 

△전주 진입로 교회(구정교회) △군산 이곡교회 △임실 오수교회 △전주 전흥교회 △전주 안디옥교회

 

목사 역임 △바울선교회 대표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