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전주안디옥교회 원로목사 이동휘 - 우리형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

12년 전에 천국에 가신 우리 형님 이진휘 목사님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감동 넘치는 설교가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이다. 설교에 있어서는 나의 멘토이시다. 15세에 교회 집사가 되고 16세부터 설교가로 활동하여 46년 동안 한결 같이 목회의 길을 걷다가 군산 성광교회에서 사명을 마치시고 7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유년 시절이지만 형님의 설교를 들으면 심장이 터지는 감격을 받게 되었고, 생의 변화를 일으켰다. 10대에 능력 넘치는 설교를 하여 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이었다. 나는 일생동안 이러한 설교를 하기를 원했고, 또 사모하였다. 일주일의 식량 되기에 충분한, 세포 속에 파고드는 설교가 이 시대에 재현되었으면 하였다.

 

형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매일 다섯 차례씩 기도하였고, 능력의 원천을 파악하신 분이다. 우리 어머니가 하신 새벽과 낮 그리고 밤의 기도를 그대로 본받은 분이다. 그 기도를 다시 형님의 큰 딸 이미화 선교사가(벨리즈선교사) 그대로 계승하였다. 아름다운 미모로 결혼 할 수 있는 여건은 너무 좋았지만 모두 물리치고 일생을 처녀선교사로 활동해온 이미화 선교사는 지금 중미의 작은 나라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선교사 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형님은 매일 성경을 신약 10장 구약 10장 도합 20장씩 읽는 가운데 경건생활을 풍성하게 유지하였다. 21세의 나이에 형님은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당했다. 2차 세계전쟁에 끌려간 것은 사형 자체였다. 먼저 주재소(지금 경찰파출소) 앞에 집결하여 일본순사의 최후 지령과 훈시를 받았는데, 그곳은 엄한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구정교회 교인과 학생들은 일제히 같이 갔다. 바로 그 주재소 앞에서 국기를 흔들며 찬송과 동요를 면 소재지가 떠나갈 정도로 불렀다. 평소에 소극적인 청년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참 늠름한 자세로 하나님 찬양을 마음껏 불렀다.

 

조선 청년들을 앞에 놓고 전쟁의 영웅이 되라고 흥분된 연설을 한 뒤 순사부장이 출정하는 군인들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는 순서가 되었다. 모두 굽실거리며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엄한 분위기였지만, 형님은 그것까지도 두 번이나 거절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평소에 술을 입에 대지도 않은 신앙절개를 끝까지 지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일본의 총칼이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더 높으신 하나님이 위에 계시다는 신앙은 형님을 오직 담대함으로 무장시켜 결국 하나님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에 끌려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이 되어 살아 돌아왔다. 일본에 군인으로 있는 와중에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신사참배도 하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기이한 도움을 받아 성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원칙에 충실하다 보니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타협을 모르는 목사로 개인적인 고달픔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성실성으로 형님은 당시 기장교회로서는 도내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루었고, 모범적인 목회자상을 보여주었다. 개척교회에도 큰 관심을 보여 많은 교회를 세우는 일과 돕는 일에도 헌신적이었다. 후손으로 남은 육남매 모두 선교사와 목사 그리고 교회의 중직을 맡아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회와 교회에 큰 공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승리자라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