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한 애국가 연주 속에 국기에 대한 맹세는 중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이렇게 낭송된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참으로 엄숙한 다짐이다. 맹세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이 다짐은 너무나 숭고하여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모든 다른 가치 있는 것들 위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두고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맹세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사회적 지위,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로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실로 종교적인 차원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다짐을 말뜻 그대로 하고 또 그 다짐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들 대부분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모든 것에 앞선다고 생각하지 않고 제각기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다양성 속에서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또한 이 맹세가 숭고한 것이라 해도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무엇인지는 매우 애매하다. 오히려 전체주의적인 또는 맹목적으로 국가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국가주의적인 냄새까지도 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적인 다짐은 위험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국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인권의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던가.
많은 이들은 이러한 다짐을 무덤덤하게 한다. 절에 가서 불상에 경배하는 것도 우상숭배라 하여 비판하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도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자신이 믿는 신의 뜻과 같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어떠한 양심의 모순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종교적 태도나 신앙이 국가에 매우 유화적으로 또는 무비판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은 아닐까?
필자 세대가 어릴 적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국기에 대한 맹세는 다들 문제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일상화되어 버린 느낌이 든다. 우리는 이러한 다짐을 요구받고 이를 결코 진심으로는 하지 않음으로써 개인의 양심과 맹세거부에 따를 사회적 압력과 제재를 지혜롭게(?) 피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지혜의 대가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 요구되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생존의 논리라는 교훈을 공식적으로 터득하게 됨으로써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짓말을 하는 데 익숙해진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송기춘(전북대, 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