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덕성여자대학교 이사장 이종훈 - 고향 군산

"장남이니 농업학교에 가야한다"

1995년 부모님 결혼 60주년 기념행사에서 가족들. (desk@jjan.kr)

나는 1935년 전북 군산시 개정면 운회리에서 부친 이융세(李隆世)와 모친 문귀옥(文貴玉)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의(全義) 이씨 집성촌의 봉건적인 대가족의 소지주 집안에서 자랐다. 증조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부모와 삼촌 고모와 동생들 10여명이 함께 사는 ‘ㅁ자’형 가옥의 전형적인 봉건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의 장손이었기 때문에 친척 중에도 형이나 누나가 없었으며, 식사 때마다 증조할아버지와 겸상하여 가르침을 받는 따분한 생활을 하였다.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절을 올려야하는 봉건적인 생활이 나는 부담스럽기만 했고, 친구나 공부보다는 집안 일이 중요했다. 항상 증조할아버지의 가르침은 훌륭한 사람보다는 올바른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말씀들이 머리 속 깊이 새겨져있다. 마을 전체가 친척이었으며 장손이라 촌수가 낮아 모두가 아저씨·할아버지였으므로 혈연관계의 중요성에 얽매여 살았다고 생각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사이토’, 2학년 때는 ‘게이도쿠’라는 일본인 여선생님이었으며, 전쟁말기였기 때문에 간단한 일본어와 군가 정도를 배웠지만, 학교생활 모두가 신기하기도 하고 무척 낯설기도 하였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40여 년 후 일본에서 공부할 때 할머니가 된 이분들을 찾아뵙기도 하였다.

 

3학년 때 해방이 되어 우리말과 글을 배우면서 어린 생각에도 국가라고 하는 의미를 (일제교육을 받은 만큼)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시절에는 별로 특징이 없는 착실한 보통학생이었으며, 학교주변에서 살지 않고 집이 다소 떨어진 시골에 있어서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한다거나 놀기보다는 서둘러 집에 돌아가기에 바빴다.

 

그래서인지 항상 주도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소극적인 생활을 한 것 같다. 이러한 학교생활은 중·고등학교·대학과 외국유학시절에도 계속되어, 언제부턴가 나 스스로 촌놈의식을 갖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중학교 입학 문제만 해도 나는 뚜렷한 생각과 주장을 갖지 못한 채 집안어른들이 결정해주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처지였다. 봉건적인 대가족이라 나의 진학문제는 부모마저도 발언권을 갖지 못하였고,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선에서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너는 장남 장손이고 집안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농업학교에 가야한다’는 것이며, 그것도 군산이 아니라 종조부 두 분이 다닌 이리농림학교가 좋다하여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학시험을 보러갔다.

 

생각지도 안 했던 기차통학으로 농업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하루에 두 번 다니는 기차여서 행여 놓칠세라 새벽과 밤으로 뛰어다니며 통학을 하였다. 농가인 집에서도 일을 하지 않았는데, 학교농장과 축사에서는 험한 일을 하였던 기억이 새로우며, 담임선생님은 나를 ‘기차통학 하는 촌놈’이라고 놀려대었다.

 

중학교 때에도 착실한 보통학생이었다. 다만 촌놈소리를 면하기 위해 공부는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2학년 수업 중에 느닷없이 6·25사변이 터졌다고 모두들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며, 그 때 당황했던 것은 기차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할 수없이 걸어서 집에 돌아왔는데, 밤12시가 가까웠다. 그 후 며칠동안은 자전거로 통학을 했는데 아스팔트길이 아니어서 큰 고역이었던 데다 학교수업도 불투명하여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수복 이후 11월쯤부터 하숙생활을 하면서 농업중학교를 겨우 마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