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를 다녀왔다. 신임교직원 여름수련회라는 조금은 강제적인 모임 때문이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라는 일을 시작하고부터 계속된 잦은 출장으로 짐을 싸고 짐을 푸는 일에는 이력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2박3일의 짧은 여정의 해인사 여행을 앞두고는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많이 망설여졌다. 스님들과 똑같은 생활은 아닐지라도 산사에서의 생활은 도심의 세속 생활과는 다른 생활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의 생활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치 않을까?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득 안고 떠나던 출장 때와는 달리 해인사로의 발길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산사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고 수련복으로 갈아입는 일이었다. 산사에서는 나를 꾸미거나 치장할 필요가 없었다. 꾸민 겉모습이 마치 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속세의 생활을 버리고, 모두가 같아 보이는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두 번째로 산사에서 필요 없는 것은 말이었다. 길을 걸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묵언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말을 잊음으로서 얻는 것들이 많았다. 오랜 만에 밥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 밥의 단맛, 고추장의 달콤한 내음, 콩나물의 고소함... 그동안 우리가 밥을 먹으면서도 제대로 밥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을 때에도 말을 줄이니까 생각이 늘었다. 보이는 것도 늘었다. 하늘이 보이고 땅이 보였다. 그리고 잊고 있던 내가 보였다. 게다가 속세에서 말 때문에 생기는 많은 오해와 싸움들을 생각해보면 묵언은 참 많은 소중한 것들을 가져다주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산사에서 필요 없는 것은 잠이었다. 10시가 넘어야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난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3시 예불로 또 하루가 시작된다. 잠이라고 해서 제대로 잘 수 있는 시간은 4시간이 채 못 된다. 그러나 짧은 4시간의 산사에서의 잠은 속세에서의 긴 잠보다 더 꿀맛 같았다.
이처럼 옷과 말과 잠을 버린 산사의 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고통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1시간이 넘는 산행을 해야 했고, 저린 발을 주물러가며 참선을 해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108배에 도전해야했고, 암모니아냄새가 코를 찌르는 재래식 화장실에 익숙해져야했다. 그러나 이런 고통들이야말로 너무 익숙해서 잊고 있었던 우리 생활의 많은 편리함에 대한 고마움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해인사는 조선팔경중의 하나인 가야산에 위치하고 있어 아름다운 산사로 유명할 뿐 아니라,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문화유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런 해인사에서의 2박3일은 산사의 아름다움 이상의 아름다운 추억을 내게 주었다. 가끔은 자연과 문화를 만나고, 그 속에서 새롭게 나를 발견하는 산사로의 여행도 권한만 하다.
/정수완(전주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