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물과 평화 - 이세재

이세재(우석고 교사)

‘평화’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 사물에 빗대라고 하면 고요한 호수를 댈 수 있을 것이다. 무거우면서도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충만한 물덩이의 유연함, 크고 작은 나무와 풀과 꽃들이 수면에 손과 발을 적시고 있는 풍광, 혹 하얀 고니라도 한두 마리 떠 있다면, 그리고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거기 물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면……

 

이처럼 평화의 이미지는 정적이며 수평적이다. 깎아지른 수직의 바위절벽에는 투쟁의 긴장된 힘이 서있고 아득한 수평선에는 포근한 휴식의 노래가 누워있다. 그런데 수직의 절벽은 현실로 존재하지만 호수나 바다의 수평선은 보이기만 할 뿐 실상 그 실체는 없다. 우리의 삶은 투쟁적 현실만 있을 뿐 피곤한 몸을 눕혀 쉴 수 있는 수평의 평화는 꿈으로만 존재한다는 걸 암시라도 하는 것일까.

 

‘수평(水平)’에는 말 그대로 물의 본질이 담겨있다. 물은 만나기만 하면 곧 하나가 된다. 형태와 색깔이 각각 다른 물방울들이 모였을지라도 제 색깔 제 모양을 나타내지 않고 순식간에 공통의 색깔과 모양이 되고 만다. 천 길 땅속에서 솟은 샘물이건 썩은 시궁창에서 흘러온 폐수이건 서로를 거부하지 않는다. 호수 바닥의 낮은 곳부터 차근차근 쌓여서 수심이 깊어지면 서로가 어깨를 맞춘다. 한 쪽이 깊어지면 다른 한 쪽이 발을 늘이고 자신이 높아지면 낮은 쪽을 찾아 키를 맞춘다.

 

그러나 수평의 기준치는 아무도 모른다. 물들의 만남에도 끝은 없다. 호수의 물들이 밤새 서로의 키를 맞추고 서로의 몸 구석구석을 채워보아도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있다. 새벽 호수를 뒤덮은 물안개. 그 그리움의 풍경을 보았는가. 물들은 어쩌면 저 에베레스트의 만년설이나 남극의 빙하로 갇혀있는 동료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눈물이 되어 마른 땅을 적시고 증발해버린 친구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물이 한 곳에 모이는 날 수평의 기준선은 그어질 것이다.

 

그날을 위해 물은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흐른다. 때로는 물안개로 그리움을 노래하고 때로는 구름이 되어 방랑자를 부르다가 비가 되고 눈이 되어 가야할 곳을 찾는다. 김수영의 시처럼 폭포가 되어 나타와 안정을 뒤집기도 하고 정적(政敵)의 참소에 가슴이 뚫린 시인 굴원의 영혼을 쉬게 하는 멱라수 맑은 강이 되어 역사를 말하기도 한다.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에서부터 계곡을 휩쓸고 강둑을 범람하는 홍수에 이르기까지 물은 오직 수평을 찾아 흘러간다.

 

2006년 7월, 홍수가 전쟁처럼 휩쓸고 갔다. ‘전쟁처럼’이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다. 물은 수평을 향해 제 길을 갔을 뿐이다. 수평과 평화가 동질일진대 우리는 왜 홍수를 전쟁처럼 겪고 있는가. 물이 물을 그리워하듯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때 홍수는 평화처럼 흘러가지 않을까. 인간의 평화도 물처럼 서로의 높이를 맞추는 데서 이루어질지 모른다.

 

/이세재(우석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