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철의 건축이야기] 비문(碑文)과 당호(堂號)

비석엔 음각을, 살림집엔 양각을

한국전쟁의 상흔을 배경으로 한 ‘비목’이라는 가곡이 있다. 노래를 듣다보면 장일남 선생의 선율도 애장하지만, 수채화처럼 머릿속에 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한명희 선생의 가사는 더 애처로운 사연을 담고 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그 어느 비목(碑木)은 그렇게 이름에서부터 슬픈 얘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비목은 전쟁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대충 만들어 세운 일종의 비석이겠지만, 아마 거기에 새겨진 어느 병사의 묘비명은 음각(陰刻)을 했을 것 같다. 도장을 파듯이 글씨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양각(陽刻)보다는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음각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예로부터 묘비에 새기는 글씨는 음각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거기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음양(陰陽)사상이 깊숙이 배어있다. 일종의 우주관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볼록하게 튀어나온 것은 양이고, 움푹 들어간 것은 음이라는 기본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늘이 양이라면 땅은 음이 되고, 남자가 양이라면 여자는 상대적으로 음이 된다. 또 만물이 성장하고 솟아오르는 봄여름이 양기(陽氣)의 작용이라면, 가을겨울에 그 결실을 거둬들이고 저장을 하는 것은 음기(陰氣)의 작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에서도 음양의 구분은 엄격하였다. 삶의 공간은 양택(陽宅)이라고 하는데 비해서, 땅속으로 죽어서 들어가는 공간은 음택(陰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제 집 이름을 어떻게 짓든 그것은 집주인 나름대로의 식견이 되겠지만, 당호(堂號)를 새기는 방법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 사는 살림집을 지을 때, 그 집에 양의 기운이 충만 하라는 염원을 담아서 글씨 자체도 볼록하게 튀어나오도록 양각(陽刻)을 하였고, 상대적으로 무덤의 비석에는 음각(陰刻)을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에도 마치 비석에 새기는 글씨처럼 음각을 해놓은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긴 지금은 하리수처럼 남자가 여자가 되기도 하고, 또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어지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굳이 그런 걸 따지고 가리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행복하게 잘 살겠다고 정성껏 지은 집의 현판에 당호를 비문(碑文)처럼 새겨놓고, 그 밑으로 들락거리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된다. 이치를 따져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삼호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