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과연 지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260자 밖에 되지 않는 반야심경에 보면 불교에서는 반야라고 말한다. 관세음보살께서 지혜가 무엇인가 깊이 관하실 때에 일체가 다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시고 일체의 모든 고통과 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전제하고 있다.
공하다는 말은 영원하지 않다(제법무아)는 것, 모든 것은 다 변하고 있다(제행무상)는 불변의 사실일 뿐이다. 결코 허무주의적 논리나 허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반야바라밀에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고로 마음가운데 그 어떤 망상과 걸림돌도 생겨나지 않게 되며 걸림이 없게 되면 어떤 두려움도 없게 되어 잘못된 전도몽상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나 어떤 판단을 종교적으로는 지혜라고 하지 않고 지해 혹은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종교적으로 말하는 지혜는 모두의 행복과 안일을 위하여 용서하고 양보하고 베품과 나눔을 실천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희열, 감동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무엇 한 가지도 진정한 의미에서 내 소유는 없다.
무상과 무아이며 결국은 일체가 다 고통(일체개고)이라는 현실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수반되면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하여 심사숙고가 이루어 질 것이며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선정하는, 즉 명상하는 삶을 생활화 하여야 할 것이다.
명상의 삶이 익숙해지고 깊은 사려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뒤에 할 말이지만 바른 선정이 이루어져야 지혜의 삶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이 중생이라고 하는데 중생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삼독의 번뇌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깊은 선정과 지혜로운 마음을 구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승리하기 위해서 적을 만들기보다는 양보하고 관용하여 친구를 만드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이다.
언제나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고 사실에 대한 인식이 보다 확실해 질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기변화 즉 인식의 대전환이 가능해 질 것이다. 항상 변화하는 삶의 올바른 가치관은 다른 것이 아닌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로 재듯이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포용하고 포함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우리들 미래가 황폐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반야바라밀을 말한다.
/도영(송광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