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백의 一日五話] 노몽항 전투 소련군 장갑부대에 일본 대패

《9월 15일》

 

①사소한 민원 쏟아져 철폐

 

조선 3대왕 태종이 백성의 소리를 광범하게 듣기위해 '신문고'를 설치한 것은 1401년의 오늘이었다. 대궐의 문루에 매달았던 이 신문고에는 하찮은 일까지 마구 진정해오는 사례가 허다하여 얼마 안가서 폐지됐다. 이 제도는 중국 송나라에서 이미 실시한바 있었다.

 

②유엔군, 인천상륙 성공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의 오늘 하오 6시, 비 내리는 인천해안으로 한미해병대가 상륙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미 해군 사령관 도일 소장의 지휘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관전 밑에 이뤄진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57년의 오늘, 인천에 맥아더 동상이 건립됐다.

 

③송나라 유학자 주자 출생

 

중국 남송의 유학자였던 주자는 이름은 희(憙)로 1130년의 오늘 출생. 19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한 때 관료생활을 했다. 이어 북송의 새 학풍을 이어 도학?이학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했다. 후세에 그를 높이어 '주자'라고 했으며, 저서로는 '사서집주' '자치통감 강목'등이 있다.

 

④독일군 병사들 기겁

 

전쟁이 일어나면 가공할 각종 신무기가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치열했던 1916년의 오늘, 프랑스 북부의 손무 강에서 연합군과 교전 중인 독일군이 기겁을 했다. 탄환을 되받아치는 강철제의 차, 즉 탱크가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영국군이 발명한 것.

 

⑤노몽항 전투 일본군 대패

 

만주와 외몽고 국경지대인 노몽항서 1939년 5월, 일·소 양군이 대규모의 전투를 했다. 당시 일본군은 5만6천명의 병력을 투입했는데 무려 8440명이 죽고 8766명의 부상자를 낸 대패를 했다. 소련군의 장갑부대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이해의 오늘, 정전협정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