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만 해도 사람을 평가하는데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중시했다. 글씨를 잘 써야만 실력있는 사람, 훌륭한 선생님으로 평가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왼손잡이였다. 더욱 아쉽고 답답한 것은 그 때 그 시절 사회 분위기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수저질을 하면 큰일 나는 것으로 알았고, 모두가 왼손 사용을 금기시했다는 사실이다. 즉 왼손과 오른손은 하는 일이 달랐다. 왼손은 화장실에서 뒤처리나 발등을 씻을 때 사용하고, 의관을 정제할 때나 식사하고 글씨를 쓸 때에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 했다.
왼손으로 글씨를 쓰면 바르고 예쁜 글씨를 쓸 수 있었으련만, 주위의 눈치 때문에 오른손으로 서툰 글씨를 써야 하는 속앓이, 답답함은 참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그렇다고 평생 악필(惡筆) 꼬리표를 달고 살 수 없는 일이었다. 손이 없는 사람 가운데 구필(口筆)이나 족필(足筆)로 잘 쓰는 이도 많은데 멀쩡한 오른손으로 예쁜 글씨를 못쓸 것이 없지 않은가. 나는 굳게 결심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혼자서 ‘오른손’ 서예연습을 계속했다. 1959년 낭산초등학교에 근무하던 당시 시작한 서예 독학을 무려 50년 가까이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지난 1999년 교직에서 물러나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한국예술문화협회 초대작가’대우를 받으며 더 좋은 글쓰기에 정진하고 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옛 어른들이 금기시하고 손가락질하던 왼손잡이로 태어난 덕분에 오래도록 ‘아름다운 한글’을 쓸 수 있게 됐으니 지금으로서는 그 원망스럽기만 하던 옛 관습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게다가 졸필이나마 갈고닦은 서예 실력을 바탕으로 조상님은 물론 주위 지인들에게까지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됐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자랑스럽기도 하다.
익산시 낭산면 석천리에 자리잡은 종중땅 곳곳에 모신 조상님들의 산소를 한군데로 모시는 묘역정비작업을 하면서 80여분의 비문을 모두 내 손으로 쓰는 영광을 안았고, 숭조시비(崇祖詩碑)도 나의 글씨로 제작하였으니, 조상 묘역이 영원한 나의 서예작품 전시장이 된 것이다.
이 묘역에서 우리는 매년 시제를 지내고, ‘숭조의 날’에는 전국에서 50여명의 자손이 모여 성묘하고 친목을 다지고 있다.
게다가 지난 8월22일 군산 은파유원지에서 제막식을 가진 충혼탑(6.25 당시 학도병으로 출전, 낙동강 포항 전투에서 전사한 29명의 군산사범 선배들을 기리기 위해 세움)에 위령 헌시를 새기니, 그 감회가 더욱 깊다.
남들에게 말 못할 나만의 아킬레스 건을 극복하기 위해 독학으로 시작한 서예. 그동안 전국 춘향미술대전 입선, 대한민국 미술대상전 입선 등을 하며 혼신을 다해 정진해 온 서예. 이제 교직을 물러난 나에게 아기자기한 삶의 즐거움을 더하여 주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김원배(한국예술문화협회 초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