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괴문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의?주장이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얽혀 투쟁을 하는 곳에는 으레 괴문서라는 것이 등장했다. 괴문서는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처럼 뒤에 숨어서 공격을 하는 비겁성 때문에 사회적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괴문서에 담겨진 내용이 약자의 항변이거나 거짓이 아닌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기'라는 괴문서가 나돌아 17C 유럽을 들쑤셔놓은 일이 있다. 이 괴문서는 "신과 종교는 대중의 공포와 무지에 기대어 자기들만의 특수 이익을 얻어내는 대중 농락 가공물" 이라며

 

세 명의 사기꾼으로 모세와 예수?마호메트를 지목했다. 말 그대로 괴문서라 작성자가 누군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범신론(汎神論)적 세계관을 가졌다는 이유로 유대교에서 파문당하고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던 스피노자(1632~1677)가 장본인일 것이라는 추측만 할 따름이었다. 사상의 자유가 심하게 억압됐던 시대의 음울한 흔적이 아닌가 싶다.

 

케케묵은 이야기지만 지난 1993년에 '하나회 괴문서 사건'이라는 게 터졌다. 그 해 4월2일 비하나회 장교였던 백승도 대령이 서울 서빙고동 군인 아파트에 하나회 명단을 살포한 것이 괴문서 파동을 촉발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던 것이다. 조사 결과 실제 하나회라는 군부 내 암적인 사조직이 존재했고, 명단 또한 대부분 맞아떨어졌다. 정부는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단행하고 군 기강을 바로 세웠다.

 

괴문서가 공동체문화를 훼손시키는 '공공의 적'이라는데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괴문서는 무조건 유해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언론을 포함한 공식적인 채널의 정보가 아무리 풍성하다 하더라도 모든 진실을 낱낱이 들춰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회 사건처럼 괴문서 하나로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일도 있다는 말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의도 정가에 난데없는 괴문서가 나돌아 세인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유력 대권주자들의 세력판도를 분석해놓은 이 괴문서들은 제법 그럴듯하게 작성돼 있다. 누구를 지지한다고 거론된 당사자 가운데는 음해세력의 장난이라고 발끈하는 이도 있지만 반드시 음해가 목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괴문서도 이런 괴문서는 국민들에게 꼭 해악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정치판 관전하기가 더 흥미롭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