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대중가요만 그런 것은 아니다. 피천득 선생의 ‘인연’이라는 수필에도 그런 예쁜 집이 나온다. 일본 유숙시절, 서로 그리워하게 된 ‘아사코’라는 소녀가 '뾰족지붕에 뾰족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을 보고, 들뜬 목소리로 선생에게 속삭이는 구절이 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이렇게 문학작품이나 대중가요에 나오는 '집'들은 모두 다 하나같이 동경의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예쁜 집 주변에는 이웃이 없다는 점이다. 또 생활의 편리를 위한 근린생활시설이란 것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의료시설조차도 아예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부푼 꿈을 안고 가슴 설레며 시작한 전원생활은 대부분 실망으로 끝나기 일쑤다. 아마 대중가요나 문학작품이 너무 앞서나간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전원생활은 향기롭다. 도심의 아파트들처럼 규격화된 생활을 강요당하지 않아도 되고, 위아래 층에 대해서 그렇게 예민해질 필요도 없다. 더구나 아침 새소리에 눈을 뜨고, 달빛 어른거리는 창호지 너머 풀벌레 소리에 잠이 들 줄 안다면, 건축이 주는 감흥에 저절로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순히 살기 위한 그릇인줄로만 알았던 건축이, 이렇게 우리생활에 덤까지 건네주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거기에는 일단 땀과 노고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손수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마치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건 누가 대신 해주지도 않는다. 직접 풀도 뽑고, 나무도 자르고, 때로는 비설거지도 해야 한다. 그 수고는 마다한 채, 노래가사처럼 그저 푸른 초원위에 예쁜 집만 짓고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도회지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의 자조 섞인 공상일 뿐이다.
그래서 전원생활을 제대로 하고 싶다면, 우선 서울강남을 준거집단으로 삼고 있는 우리마음부터 훨훨 털어낼 수 있어야 한다. 어느새 자연으로부터 저만큼 멀어져버린 우리마음을 다시 자연의 질서체계로 되돌리는 일, 어쩌면 그것이 전원생활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삼호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