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어 씨가 제 스스로 떨어지기 전에 들깨는 앗살하게 베어 눕힌다. 벼는 여물이 꽉 차오른 노랑빛 몸매가 논둑너머를 실없이 늠실댈 때 단번에 드르륵 훑어버린다. 고추는 된서리가 내릴 듯한 전날에 마지막 붉은 고추 일절 따내고 청고추도, 잎사귀도 우두두 숨 가쁘게 훑어버린다.
토란은 대공을 껍질 벗겨 쭉쭉 쪼개 널면 일없이 잘도 마를 가을볕 며칠 좋을 날을 골라, 늘씬하고 씩씩한 대를 인정사정도 없이 와싹 베어내고 무시무시하게 큰 호미로 알토란같은(?) 뿌리를 엉덩방아 숱하게 감내하면서 열렬히 캐어버린다. 서리 오면 위험천만 고구마는 주먹만한 크기로 살졌을 때쯤, 드렁칡 같은 웃 순을 낫으로 척척 걷어내고는 진분홍 몸피 드러날 때, 행여 찍힐세라 조심조심 설레어가며 캐내온다. 모든 밭작물은 서리가 오기 전에 거둬들여야 하지만 메주콩은 서리와도 문제없다. 그러나 낙엽지고 꼬투리가 제 스스로 벌기 전에 반드시 미리 뽑아, 너무 크지 않은 둥치로 묶어 해 잘 드는 처마 밑에 세워놓는다.
팥은 꼬투리가 완전히 연갈색으로 변하면 며칠 지나지 않아 제 스스로 헤프게 열어버리므로 어지간히 놀놀해졌을 때라면 지체 없이 뽑아, 덩굴째 둘둘 말아 콩대와 멀리 떨어진 곳에 햇빛 잘 받게 뻗쳐놓는다. 단감은 아침저녁으로 찬바람 날 때 제 몸의 대부분이 주황으로 반질반질 빛나는 것부터 점찍고, 헷갈리기 전에 오르락내리락 잽싸게 딴 후 푹신한 풀섶 위로 살며시 떨어뜨려 주워 모은다.
후휴-....... 들녘의 가을걷이란 해가 짧은지라 숨이 턱에 받칠 만큼 바쁘지만 반드시 쉴 틈을 내야한다. 들깨향이며 생 볏짚 냄새 뒤섞인 선선한 바람 앞에 땀범벅이 얼굴을 내밀고 심호흡하는 기분은 오로지 농사꾼들만이 느낄 수 있는 싱싱한 행복이다. 황금들판을 넘실대는 바람은 폭넓은 비단이불깃 같으며 감나무밭의 가을바람은 폭 좁은 긴 치맛자락 같은데, 바람의 모습까지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농사꾼만의 특권이다. 비록 거둬놓은 생산물들을 저울에 달고 내다파는 순간, 보람이 아닌 시름덩어리로 전락할지언정 가을날의 농꾼들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
헬렌 켈러의 스승이 그랬다던가? ‘사랑하면서 성공도 하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실패했더라도 계속 사랑하는 일이다’ 나는 그 말을 알기 전부터도 그랬다. 비록 제값 받아보는 성공은 별로 해본 적 없지만 농사꾼이라는 직업에 대한 사랑을 그만두겠다고 여겨본 적은 없다. 후회 없이 흘려댄 땀방울 뒤의 후련함이나 가을들녘 바람 속 휴식의 달콤함을 맛본 농사꾼이라면 실패했더라도 좌절하지 않는다. 제값 받지 못한 실패는 농민의 탓이 아니며 성공은 한순간에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꿈으로 남겨두었기에, 봄만 되면 어김없이 손, 발을 재촉해대며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가을을 향해 들판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밑지는 장사 안한다는 세상 속 사람들의 야무진 계산법을 모를 리 없건만 세상의 바깥쪽에는, 농업을 포기해버리려는 정부의 야속한 홀대와 날로 불어가는 빚더미 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는 농민들이 살고 있어서, 가을마다 들판은 풍요롭게 일렁거리며 보는 이들에게도 황금빛 포만감을 선사하는 것이리라.
/박찬숙(전 전북여성농민연합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