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사람] 부모공경...집안일...그 다음이 나죠...

'효행' 생활의 근간으로 살아온 고창 김연례씨 효행상

효행상 시상식 모습. (desk@jjan.kr)

고창군 무장면 새치마을은 풍수지리상 숙조투림형(宿鳥投林形·새가 자고 가는형)이라고 해 조치(鳥峙)로 불린다. 풍수지리보다 마을 사람들의 인심과 정이 훈훈함을 더해 지나가던 새도 잠을 청하는 것은 아닐런지.

 

그 해답은 시할머니와 시부모 등 세 분을 봉양, 효행을 생활의 근간으로 삼아온 김연례씨(72)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김씨의 효행기는 열아홉살되던 해 남편 정휴량씨(70)와 결혼하면서 시작됐다. 시집오자마자 김씨의 하루 일과는 시할머니를 살피는 일이었다. 식사를 입에 떠넣어 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수나 목욕, 대소변까지 모두 챙겨야 했다. 그렇게 5년을 모신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지병으로 해수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시어머니가 김씨의 몫으로 돌아왔다.

 

“밤에는 길쌈한다고 잠도 제대로 못잤제. 그렇게 번 돈으로 집안 어른들께 반찬도 올리고 살림도 꾸리고 혔응게.”

 

부모를 공경하고 집안일을 챙기는 것은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말하는 김씨의 굴곡진 삶은 아픈 몸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2003년 이후 척추 수술을 2번이나 한 뒤에야 몸을 가눌 수 있게 됐단다

 

“집사람이 고마운 사람이지.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시댁어른 세 분을 모시느라 자기 몸 하나 챙길 시간이 없었으니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아버지가 치매로 쓰러져 대소변을 또 받아냈어. 요즘은 장례만 치르고 탈상하는 것이 상식인디 이사람은 세분 모두 3년 탈상을 했으니 장허제.”

 

김씨가 ‘집안의 보물’이라는 남편 정씨는 효심은 집안에서 어른들과 생활하며 자연스레 체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김씨의 시부모도 한국전쟁때 피난가자는 주위 사람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나 하나 살자고 노모를 두고 갈 순 없다”며 고향에 남아, 훗날 무장향교에서 효자효부로 향천했단다.

 

“요즘 사람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이 웃어른 공경이나 효행을 멀리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김씨의 효행은 입소문을 타고 번지면서 지난 19일 고창충효회(회장 김경수)로부터 효행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