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백의 一日五話]임란 때 승병장 서산대사 입적

◎ 1월 23일

 

임란 때 승병장 서산대사 입적

 

매주 수·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①승병단 5천여 명 지휘

 

임진왜란 때 5000명의 승병단을 이끌고 관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법명을 휴정(休靜), 속명은 최씨, 호는 청허(淸虛)이다. 고아로 자라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 30세에 선과를 합격했다. 왜란이 끝나자 사명단에 맡기고 산에 들어가 1604년 오늘(음력) 입적했다.

 

②러·일에 엄정중립 선언

 

1904년의 오늘, 일본과 러시아간에 전운이 감돌자 우리 조정에서는 ‘엄정중립’을 선언했다. 이는 일본측의 무력적인 압력에 의해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그러나 ‘엄정중립’이란 말뿐으로 일본군은 우리 땅에 진주·주둔하면서 사실상 후방기지로 사용했다.

 

③에너지 절약 차량 10부제

 

1990년에 일어났던 걸프전은 우리의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에너지 위기의 극복방책의 하나로 전국의 자동차를 매일 10부제 운행체제를 강구하고 이를 1991년의 오늘을 기해 일제히 시행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단속의 완화로 흐지부지 됐다.

 

④혁신계 대거 신민당 가입

 

자유당 때 진보당 사건으로 곤혹을 치룬 혁신계 인사 윤길중 외 16명이 1970년의 오늘, 야당인 신민당에 대거 입당했다. 당시 신민당 당수는 유진산이었다. 윤길중씨는 5공화국 때는 여당인 민정당에 가입하여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

 

⑤쌀 부족으로 분식 장려

 

1960년대는 주곡인 쌀이 많이 부족하여 국민의 식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다. 미국에서 잉여곡으로 들여온 밀가루에 의존도가 매우 높았었다. 이때 정부에서는 쌀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분식을 장려하기 위한 시책으로 매주 수·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