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서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함께 확인하고, 위로하고, 그리하여 작은 약속을 이끌어내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망설여졌던 책이라고 했다. 이미 있는 글과 그림을 모아서 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독자들에게 '매우 미안한 책이며 선뜻 내키지 않는 책'이다. 그래서 몇 편은 글을 새로 쓰고 그림을 다시 그리기도 했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20년 20일. 역사의 무게가 묵중할 것만 같은 신영복 교수(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생각들을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는 대단한 기쁨이다.
신영복 교수의 그림과 글씨, 삶의 잠언이 담긴 서화에세이 「처음처럼」(랜덤하우스). 책은 '처음처럼'에서 시작해 '석과불식'(碩果不食)으로 끝이 난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라는 '처음처럼'과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또는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히는 '석과불식'은 희망의 언어인 것이다.
신교수는 "지금까지 필자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일관된 주제가 있다면 아마 역경을 견디는 자세에 관한 것”이라며 "역경을 견디는 방법은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며,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처음'을 꾸준히 만들어내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인 어려움이든 한 사회의 어려움이든 역경을 견디는 자세에 관한 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따라서 '처음처럼'의 뜻과 '석과불식'의 의미가 다르지 않고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책의 모든 글들도 이러한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들”이라고 덧붙였다.
그림을 먼저 담거나 글을 먼저 새기거나, 그건 독자의 마음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공감들이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일생 동안에 가장 먼 여행은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는 신교수는 이 책을 통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발에 이르는 긴 여정이 새롭게 시작되길 바란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지식에서 품성으로의 여행이며, 발까지의 여행은 삶의 현장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책의 날개에는 저자의 청년시절 사진이 실렸다. 20대 청년인 신영복. 젊은 날의 저자 사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만난 그의 젊은 시절은 옥고를 치르기 전이었다. 날카로운 턱선에서 예리함이 묻어난다. 이 시절, 젊은 신영복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