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칼럼] 슬픔 같이 나누는게 행복 - 김동건

김동건(전주중부교회 원로목사)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인류의 역사는 행복을 추구하는 역사요, 행복의 정의를 찾기 위한 구도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질문에 대해 성경은 마태복음에서 아주 특이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여덟가지 행복을 가르쳐 주셨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등등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복이 밖(out)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in)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취물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행복은 나누고 베풀어주는 삶에 깃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마음 씀씀이가 가난한 사람을 향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재벌이 아니셨습니다. 재벌이 아닌 예수님은 불행한 분이셨습니까? 아닙니다. 돈이 많지 않았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병든자와 창기와 세리들을 향해 마음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들을 향해 있었고, 이들을 구원하는 데 온 마음을 다하셨습니다. 반면 부와 명예만을 쫓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의 끝은 어디입니까? 더 높이, 더 많이, 이런 사람들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모두의 마음을 슬프게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미군기지 주둔 다산부대 영어통역병이었던 고 윤장호 하사가 자살폭탄공격으로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인 병사가 해외 파병 기간에 숨진 최초의 사건이었고, 특별히 평화유지군으로 참여한 병사였기에 온국민이 충격과 아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의 과정을 통해서 받은 더 큰 충격은 일부 현역 군인들이 폭탄테러로 숨진 고 윤장호 하사(27)의 영결식 때까지 '골프를 자제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3ㆍ1절 휴일에 골프를 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취미와 기호를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골프를 칠 수도 있고, 테니스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골프장에 있었던 군인들이 과연 윤장호 하사를 동료로 생각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베트남전 파병 이후 첫 번째 테러 희생자가 발생한 마당에 같은 군 동료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행위였는지가 궁금한 것입니다.

 

무감각증이라는 불치병이 있다고 합니다. 중추신경에 이상이 생겨서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부딪혀도, 뜨거운 불에 손을 데어도 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곪아서 칼로 도려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또 샴쌍둥이가 있습니다. 머리가 둘인데 몸통은 하나인 기형적 쌍둥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샴쌍둥이가 한사람인지 두사람인지를 분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지혜에 따르면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나머지 한쪽도 뜨겁다고 하면 한 사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는 없겠지만, 이 이야기에는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아주 특별한 교훈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행복은 이런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바로 ‘애통하는 행복’인데,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슬퍼할 수 있는 행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같이 슬퍼하는 자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슬픔에 빠질 줄 아는 사람,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의미입이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슬픔에 빠집니까? 고통당하는 자와 더불어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 슬픔에 빠질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윤하사의 사건으로 슬픔을 당한 가족을 보면서 우리 마음속에 애통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솟아나기를 바라면서...

 

/김동건(전주중부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