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와 같이 고문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고문서를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고역이다. 정자(正字)로 반듯반듯 쓰여 있어도 한자(漢字)로 쓰여 있어서 잘 해석이 되지 않는데다가 심지어는 초서(草書)라고 해서 흘린 글씨로 작성되어 있으니 도통 뭐가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캐묵어 냄새나는 고문서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읽는 것은 나름대로 커다란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용이 잘 파악되지 않아 이리저리 생각하는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 또 어느 한 사안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설이 길어졌다. 우선 조선후기에 전라도 장수현 계남면 곡리(谷里)에 살았던 양사헌(梁思憲)이라는 사람이 을유년 정월에 자기 고을의 수령에게 제출한 탄원서 한 장을 살펴보자.
"이와 같이 삼가 아뢰는 말씀은 제(民)가 몸가짐을 삼가지 못하고 노름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곤장을 맞은 지 이미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노름을 하다 진 빚 170냥 가운데 50냥은 벌써 이기찬(李基贊)에게 갚았습니다. 나머지 120냥을 지금 간신히 변통하여 분부에 따라 관정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 돈을 뒷날 이기찬이 (받지 않았다면서) 다시 요구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서 염려되오니 논리정연한 판결문을 써주셔서 뒷날 증빙을 삼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는 신분 사회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수령에게 탄원서를 올릴 때에도 신분에 따라 쓰는 용어가 달랐다. 양반들은 자신을 '민(民)'이라고 하였고 평민이나 천민은 '의몸(矣身)'이라 하였다. 양사헌이 자신을 민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신분은 양반이었는데 노름을 하다 빚까지 지고 그 벌로 옥에 갇히고 곤장까지 맞았으니 양반으로서 체모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정월, 매서운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한 엄동설한에 감옥에 갇혀 있으니 얼어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조선후기 감옥은 지붕만 있을 뿐이지 벽은 감시와 환기를 위해 트여 있었으며 바닥은 맨 흙 또는 마루였다. 추운 겨울에도 깔거나 덮는 것은 기껏해야 짚으로 만든 거적때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 얼어 죽는 일이 많았다.
아무튼 이와 같이 추운 때에 양사헌이 곤장을 맞고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그의 가족은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노름빚 갚을 수 밖에 없었다. 급히 50냥을 만들어 이기찬에게 갚고서 선처를 호소하였지만 이기찬은 나머지 120냥이 남았다며 합의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수령에게 호소하였더니 수령이 슬그머니 120냥을 관아에 바치라고 하였다. 그의 가족들은 할 수 없이 나머지 120냥을 만들어 수령에게 바쳤지만 양사헌은 슬며시 미심쩍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노름빚을 수령에게 바치라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인데 노름빚을 수령이 가운데서 가로채도 양사헌이나 이기찬 모두 항의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령의 엄한 분부를 어길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만일 그의 분부을 어기면 감옥에서 풀어줄 리가 없었다. 양사헌은 감옥에서 생각다 못해 탄원서를 올려 이기찬이 후에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할 가능성이 있으니 증빙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수령이 어찌 이를 모르고 넘어가겠는가? 양사헌의 요청을 받은 수령은 "(잔 말 말고) 처분이나 기다려라”고 당당하게 명령하였다. 수령은 큰 도둑이었던 것이다.
/전경목·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