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정치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 역시 흥미있는 연구감이다. 정치인에 대한 한국인의 신뢰도는 최하위 수준에 머물고 자질있는 정치인을 훈련시키는 변변한 학원조차 없는데도 정치에 인생을 걸려는 사람은 끊임없이 배출된다. 정치에 대한 경멸과 비난을 일삼으면서도 정치적이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도 곧잘 발견된다.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이런 현상을 분석하고 성찰하는데 도움을 주는 정치사회학 분야의 고전이다. 이 책은 베버가 죽기 직전에 행한 강연 원고로서 얇은 문고본 수준의 적은 분량에 불과하지만 베버 만년의 중후한 사상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 그의 다른 강연인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함께 정치와 윤리, 권력과 이성이라는 주요한 쟁점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관련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온 책이다.
베버는 정치를 권력을 장악하려는 권모술수와 동일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선한 목표를 추구하는 이타적인 선행처럼 보지도 않았다. 그는 '악마적인 것'과 정치의 불가분성을 강조하는데 인간의 삶에 악마적인 것이 불가피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부정적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냉정한 노력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것을 "두꺼운 철판에 열정과 의지로 구멍을 뚫어나가는” 일에 비유하였다.
베버는 또 정치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직업정치가들의 등장을 주목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직업정치인 보다 오히려 시민운동가들이 '순수'하다는 이유로 좋게 평가되기도 하는데 베버는 오히려 전문적인 정치가집단의 출현이 지니는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베버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정치를 직업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질이 요구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베버는 '비창조적 흥분' 상태, 자기중심적인 성취욕 등은 아마추어적인 것이라 비판한다. 또 내면적인 열정이 없이 합리적인 수단적합성만 따지는 관료적 태도도 비판한다. 나아가 결과에 대한 책임보다 주관적 의도나 선의만을 강조하려는 종교적 심성도 정치적 자질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베버는 직업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요소로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의 세가지를 강조하였다. 열정은 대의나 가치에 대한 적극적 헌신을 뜻하며 책임감은 자신의 열정이 현실 속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냉정하게 따지고 계산하는 태도이다. 균형감각은 내적 검증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즉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베버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치에 대한 열정이 없는 정치인도 곤란하지만 결과에 대한 냉철한 책임감 없이 주관적 선의만 내세우는 정치인은 더욱 곤란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베버는 직업정치인은 '책임윤리'라는 독특한 에토스를 내면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윤리는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책임감을 강조하는 독특한 정신이다. 베버는 이 책임윤리야말로 '정치의 윤리적 고향'이라고 주장한다. 종교인의 윤리나 마키아벨리적 권력정치를 모두 뛰어넘으면서 책임윤리의 에토스를 내면화한 사람만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수행할 수 있다고 베버는 주장하였다. 올해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윤리적 에토스를 지닌 정치인, 이런 책임감을 사회화하는 정치를 볼 수 있을까? 한국의 현실에 관심 있는 지성적인 독자들의 일독을 강력하게 권한다.
/박명규(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