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객사와 원(院)이었다. 객사는 시설이 가장 좋아 오늘날 특급 호텔격이었고, 원은 시설 좋은 여관급이었다.
원은 원래 불교에서 유래된 숙박시설로 고려시대에는 큰 사찰을 사(寺), 작은 절을 원이라 했다. 따라서 사원이란 이 두 개를 합친 표현이다.
원은 간선도로에서 사찰로 들어가는 진입로 길목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산사가 세속과 접촉할 수 있는 관문 역할을 했다. 원은 명산대찰을 순례하는 승려들과 재가 신도들뿐만 아니라 행상들에게도 숙식을 제공했다.
또한 원에는 의술을 익힌 승려가 있어 행려병자를 치료하고 빈민구제사업도 실시했다. 원의 책임자인 원주(院主)는 상인들과 접촉하며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물품을 구입했는데, 상인들은 원을 통해 사찰에서 생산한 종이, 불구(佛具), 술, 소금 등을 구입하여 시장에 판매하였으며, 원에서 자금을 융자받기도 했다. 원이 교역소 역할도 겸한 것이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불교가 쇠퇴했기 때문에 원이 지니고 있던 종교적인 부분은 사라지고 단순한 숙박 기능만 남았다. 오늘날 조치원, 장호원, 제비원 등의 지명들은 고려시대부터 그 지역에 존재한 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 과객들이 숙식을 해결한 두 번째 장소는 주막이다. 주막은 여관에다 식당을 합한 곳으로, 조선시대 평민들이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숙박시설이었다.
세 번째 장소는 불교 사찰이다. 불교 사찰은 공식적인 숙박시설은 아니었지만, 고급 관료나 지체 높은 양반이 여행을 하다가 인근에 숙박시설이 없으면 가까운 사찰에 임시로 머물 수 있었다.
네 번째 장소가 바로 양반가 사랑채다. 주로 학문을 익힌 선비들이 많이 이용했다. 집주인에게 그 학문과 인품을 인정받은 선비는 장기간 무료로 체류할 수 있었다니 꿈같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