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신호적

직역(職役)대신 직업(職業) 기입...호적 기재형식 갑오경장후 변화

1902년에 만경군에 사는 최아무개가 작성한 신호적. (desk@jjan.kr)

호적관련 문서들은 오늘날 남아 있는 고문서 가운데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별다른 전문지식이 없어도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호구단자는 호주들이 자신의 호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여 관에 제출한 문서로, 호적대장을 만드는 기초자료로 사용되었다. 반면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것으로, 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호적대장에서 해당 호에 관한 사항을 그대로 베껴 호주들에게 발급한 것이다. 그런데 호구단자이건 준호구이건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은 똑같다. 결국 한 가족의 명단을 싣고 있는 것이다. 다만 조선왕조가 오늘날과는 다른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몇 가지 독특한 사항이 들어 있을 뿐이다. 우선 가족 구성원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 신분을 식별할 수 있는 직역(職役)이 기재되었다. 이조판서 OOO, 생원 OOO, 사노(私奴) OOO 등등. 그런가 하면 호주와 그 아내의 경우에는 4조(祖)를 함께 기재하였다. 4조는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가리킨다. 이들 4조의 경우에도 직역이 기재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가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누구의 아들이며 손자인가, 어느 신분에 속하는가가 더 중요한 신분제사회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노비를 소유하였을 경우에는 호적의 말미에 그 명단을 죽 기재하였다. 심한 경우 1백여 명 이상의 노비들이 수록된 양반호구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호적의 기재형식은 1896년의 갑오경장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때 호구조사 규칙과 세칙이 제정되면서 신분의 확인보다는 국세조사를 호적 작성의 주요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 오늘 소개하는 고문서는 1902년에 작성된 신호적이다. 문서에는 호적표(戶籍表)라고 적혀 있지만 과거의 호적과는 다르다는 뜻으로 흔히 신호적이라 불린다. 만경군에 사는 최아무개가 작성하여 관에 올린 이 문서는 기왕의 호구단자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점들이 눈에 뜨인다. 일정한 양식에 따르되 규격화된 용지가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인쇄용지의 빈칸에 해당사항을 기입하도록 바꾸어졌다. 동거친속, 현존인구, 가택의 소유권 여부와 형태 등 근대적 용어들이 좀 더 친숙하게 눈에 와 닿는다. 호주의 4조만 기재하고 아내의 4조를 기재하지 않는 점도 예전과는 다른 점이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호주의 직역 대신에 직(職)과 업(業)을 기입하는 항목이 추가된 점이다. 이 문서에서는 직에 유학(幼學), 업에 농(農)이라고 각각 기입하고 있으며, 4조와 자식들에 대하여도 유학이나 학생이란 직역을 기재해 놓고 있다. 당시 60살의 호주는 아내와, 결혼한 아들 부부, 손자 등 아홉 식구의 가장으로 농사를 지어먹고 살고 있었지만, 양반 신분에 대한 집착은 여전하였던 것이다. 사실 신호적의 호주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들의 직업난에 선비 ‘사(士)’자를 적어 놓고 있다. 몰락해 가는 왕조의 씁쓸한 단면이다.

 

/유호석·전북대 박물관 학예연구사